본문 바로가기

별별책/2015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 에쿠니 가오리 | 소담출판사

반응형

 

[이미지 출처 - 알라딘]

 

 

 

3세대, 100년에 걸친 '언뜻 보면 행복한' 가족 이야기

 

 

 

어떤 스토리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제목이었지만, 과연 에쿠니 가오리답다 싶은 생각에 어쩐지 모를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게 이 소설의 발간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의 첫 인상이었다. 이후 예약 주문했던 것을 받아 들고 '3세대, 100년에 걸친 언뜻 보면 행복한 가족 이야기'라는 표지 활자를 눈으로 읽으며 그제서야 책 두께만큼이나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겠구나 싶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더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보고 느끼는 것은 사뭇 다를 수 있고, 그러함을 알게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서 의식하며 지내왔던 터라 순간적으로 더욱 끌렸던 소감도 말해 둬야 할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야나기시마 일가를 통해 결국 혼자인 이들의 삶을 들여다 보는 일이 무척이나 은밀하게 느껴졌고 기대됐다.

 

 

 

더보기

 

* 등장인물

 

- 리쿠코 : 야나기시마 일가의 차녀 / 노조미 : 언니 (기쿠노와 기시베 사이의 딸) / 고이치 : 오빠 / 우즈키 : 동생 (도요히코와 아사미 사이의 아들)

- 도요히코 : 아빠 / 기쿠노 : 엄마 / 유리 : 이모 / 기리노스케 : 외삼촌

- 다케지로 : 할아버지, 무역회사 경영 / 기누(올가) : 할머니, 러시아인

 

 

* 시점 : 화자 / 주요 내용

 

1. 1982년 가을 : 리쿠코 / 가정에서 공부하던 기존 교육방침과 달리 오빠인 고이치, 동생 우즈키와 함께 초등학교에 다니게 됨. 그러나 석달 뒤 그만 둠

2. 1968년 늦봄 : 미즈에(기시베 부인) / 기쿠노와 기시베 사이에서 노조미 태어남

3. 1968년 가을 : 기리노스케 / 일본을 떠나온지 1년 남짓(아시아 국가 → 터키 → 유럽), 카오사와 만남

4. 1987년 여름 : 리쿠코(13) / 고이치(16)·우즈키(12), 노조미는 작년에 대학 입학, 가정 교사였던 노무라의 저택 방문, 욕실 증축

5. 1960년 가을 : 도요히코 / 기리노스케(15)·기쿠노(23), 기쿠노 가출, 기쿠노와 도요히코 파혼, 도요히코가 바라본 야나기시마 일가

6. 1963년 겨울 : 유리 / 반년 동안의 불행한 결혼 생활

7. 1973년 여름 : 노조미 / 기시베의 딸로 4살 많은 치하루와의 만남, 치하루·기시베와 함께 동물원 구경

8. 1984년 한여름 : 우즈키 / 저택에서 우즈키가 좋아하는 공간인 정원, 시즈에 손자이자 우즈키의 친구인 후미오의 방문

9. 1964년 5월 : 기쿠노 / 가출 후 기쿠노 혼자 거처하는 자취집에 기시베가 옴, 동생인 유리·기리노스케와의 식사

10. 1989년 늦가을 : 교코(고이치의 여자친구) / 성스러울 정도로 신사적인 고이치

11. 1990년 초여름 : 노조미 / 할머니가 노조미의 베이징대학 유학 반대, 그러나 곧 떠날 예정

12. 1972년 5월 : 시즈에(이웃집에 사는 기누의 친구이자, 우즈키의 친구 후미오의 할머니) / 기리노스케의 귀국, 기쿠노 가출에서 돌아옴, 다시 북적이게 된 저택

13. 1974년 1월 : 도요히코 / 기쿠노(36)와 결혼 5년째, 새로운 여자이자 장인의 비서인 아사미 등장

14. 1974년 2월 : 기쿠노 / 도요히코가 부인인 기쿠노에게 아사미에 대한 마음 고백, 기쿠노의 리쿠코 임신

15. 1976년 봄 : 아베(도요히코와 아사미의 단골 식당 남자주인) / 11월 우즈키가 태어남, 잔치에 초밥을 만들기 위해 저택 방문, 노조미(7)· 고이치(5)

16. 1994년 겨울 : 리쿠코 / 삼촌 기리노스케와 영화 나들이, 가정 교사 노무라는 작년 폐암으로 사망, 우즈키는 낳아준 엄마인 아사미와 살기로 함

17. 1995년 봄 : 우즈키 / 아사미와의 생활도 1년이 지남, 우즈키의 전문학교 생활

18. 2000년 2월 : 유리 / 고이치와 교코의 결혼식

19. 2000년 여름 : 노조미 / 남자친구 데릭과 홍콩에서 동거, 삼촌 기리노스케는 암으로 죽음

20. 1969년 여름 : 기리노스케(24) / 자유분방한 뉴욕 생활, 아르바이트로 웨이터 일을 함, 섹스파트너인 유부녀 헤서(30)와의 관계

21. 2000년 초겨울 : 기누(러시아 이름 : 올가) / 1917년 생, 도요히코 아버지와 좋아하던 사이였으나 이미 아이가 있는 유부남, 결혼은 다케지로와 함

22. 2001년 3월 : 교코 / 도요히코(68)와 기쿠노(64)의 이혼, 도요히코는 자신의 부모가 살던 집에서 생활하던 아사미와 지내기로 함, 노조미와 데릭은 작년 런던으로 이사

23. 2006년 늦가을 : 리쿠코 / 고이치와 교코의 아들 카이가 작년 태어남, 기쿠노와 유리 그리고 리쿠코만 남은 야나기시마 일가의 저택 

 

 

 

 

내 머릿속은 온통 나의 정원 생각뿐이다. 장화를 신고 후드 달린 비옷을 입고, 비 오는 날에도 나는 정원을 둘러본다. 진창을 밟으며 빗물이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는 장소를 찾아낸다. 한 잎 한 잎 비에 맞아 흔들리는 나무 이파리를 바라보고, 물받이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떨어져 쌓인 꽃잎을 어루만지고, 나무들이 물을 빨아올리는 것을 상상한다. 젖은 흙냄새를 맡고, 후드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얼굴로 맛본다.    - p.267

 

"라이스에는 소금을." 암호를 중얼거린다. 그래서 나도 말했다. "그래, 유리. 라이스에는 소금을!" 이건 우리 세 사람에게만 통하는 표현으로 굳이 번역하자면 '자유 만세!'다. 공기에 든 흰쌀밥은 그대로도 맛있어 보이는데 접시에 담긴 밥에는 왜 그런지 소금을 치고 싶어진다. 우리 셋 다 그렇다. 하지만 예의없어 보이고 소금을 과잉 섭취하게 된다는 이유로 어릴 적에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 다행이다, 자유 만세.'라는 의미다.    - p.290, 291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몇 가지를 배웠다. 세상은 책 속과 비슷하다는 것이 그중 하나인데 이 발견은 그야말로 내 인생이 뒤집힐 만한 대사건이었다. 일찍이 나는 책 속이라면 안심이지만 책 바깥은 불안하다고 여겼다. 책 속의 일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책 바깥의 일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책 바깥도 책 속과 똑같다. 여러 다양한 사람이 있고 다양한 사정이 있다. 여러 시대가 있고 여러 장소가 있고 여러 가지 일이 잇따라 일어난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람은 미워한다. 사람은 만나고, 사람은 헤어진다. 세상이 책 속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부터 나는 무척 자유로워졌다.    - p.570, 571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은 장 마다 다른 화자가 등장하는데, 그 수가 무려 12명이나 된다. 그 가운데 눈 여겨 읽게 됐던 장은 의외로 야나기시마 일가 이외의 인물이 등장한 경우였는데,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좋은 남편을 뒀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미즈에가 화자로 나선 1968년 늦봄의 이야기다. 남편 기시베에게 연인이 아니라 친구였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친구라는 이가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이다. 그런 까닭에 미즈에가 느끼는 자책과 분노에 대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정을 듣게 된 때는 반년쯤 전이다. 나는 기시베에게 행주를 내던지고 분을 못 이겨 흐느껴 울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렇게 좋은 남편과 딸을 주셔서 고맙다느니 행복하다느니 날마다 감사하기 바빴으니, 이 얼마나 어수룩한 여자인지―. 그럼에도 나의 소중한 것은 전부 이곳에 있으니 나는 그 심정을 있는 그대로 기시베에게 쏟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 1968년 늦봄, p.65

 

 

 

1976년 봄 편에 등장한 아베의 시점에서 그려진 부분도 그렇다. 아베는 기쿠노의 남편 도요히코와 다케지로의 비서이자 도요히코의 새로운 여자, 그리고 우즈키를 낳은 사람이기도 한 아사미의 단골 식당 남자 주인으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식당을 즐겨 찾는 이 둘과 마주하며 그들이 부부 관계라고 줄곧 생각해 왔다. 하지만 저택 잔치에 초밥을 만들기 위해 들렀다가 도요히코에게 부인 기쿠노와 아이들이 따로 있음을 알고 적잖이 놀란 모습으로 그려진다.

 

 

"엄청 근사한 집이었어요, 그렇죠?"
다카오가 뭔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따뜻한 기분이 들고, 거기에 내 스스로 당황하고 있었다. 미혼인 채 아이를 낳는 데에는 적지 않은 각오가 필요했을 테고, 더구나 본부인이나 그 가족들에게 환영받았을 리 없다. 하지만 한곳에 모여 손을 흔들고 있던 그들은 행복한 대가족처럼 보였다.    - 1976년 봄, p.416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행복해 보이는 대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는 아베의 심경은 내가 야나기시마 일가를 들여다 보며 느꼈던 것과 똑 닮은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 분명한데, 뭔지 모를 따뜻한 기분을 들게 하는 이 가족이 내뿜는 기묘함 같은 거다. 이러한 낯선 느낌은 고이치의 여자친구였다가 훗날 고이치의 부인으로서 야나기시마 일가의 일원이 된 교코를 화자로 한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감지된다.

 

 

"옛날부터 세상에 대한 체면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집이니까." (…)
세상에 대한 체면-―. 나는 거기에 대해 생각한다. 고이치네처럼 부자는 아니지만 나는 제대로 된 가정에서 성장했다. 세상에 대한 체면이란 곧 자기의 양심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신경 쓰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시누이에게 그렇게까지는 말할 수 없다.    - 2001년 3월, p.566, 567

 

 

 

이 외에 야나기시마 일가의 이웃에 사는 기누의 친구이자, 우즈키의 친구인 후미오의 할머니로 등장하는 시즈에가 화자로 등장하는 1972년 5월의 짧은 이야기도 눈여겨 볼만 하다. 그야말로 제3자가 언뜻보기에 행복한 야나기시마 일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각자가 새로운 사람에게서 낳은 자식이 있다던지(그러나 기시베 부인과 같은 분노의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맡기는 교육 방침이나, 러시아인 할머니 기누가 사랑한 상대가 남편이었던 다케지로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는 사실, "옛날부터 세상에 대한 체면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집이니까." 라고 말했던 노조미의 말을 들어보면, 역시나 평범하지 않은 일가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져도 에쿠니 가오리의 글 속에서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고 어쩐지 납득이 돼 버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이 가족의 독특한 사연마저도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인 양 무심하고 담담하게 적은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문체의 힘이 아닐는지. 뿐만 아니다. 생각해보면,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각 집안마다 행복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그 집안 구성원들만의 비밀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독특한 야나기시마 일가의 모습이 마냥 이질적으로 다가오지 만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물론 위에 적은 미즈에나 아베, 교코 그리고 시즈에라는 야나기시마 일가에서 한 발짝 물러선 인물들을 통해 읽는 이들을 충분히 납득시켜줬던 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어찌 됐든 야나기시마 일가의 일원이지만, 그들에겐 각기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존재했다. 그러기에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 안에서 겪어 나가는 자신만의 이야기 혹은 동일한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면서도 각자가 느끼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는 일은 역시나 제 3자에겐 흥미로운 일이었다. 에쿠니 가오리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던 '언뜻 보면 행복한' 가족 이야기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고.

 

 

그때 우리가 바라보았던 것은 정원 한 모퉁이에 척척 완성되어가는 건물이 아니었다. 갓 깎은 나무 벤치도, 새 욕조도 아니었고, 빨갛고 노란 선이 구불구불 들러붙은 배전반도 아니었다. 나와 우즈키가 숨죽인 채 열심히 지켜보았던 것은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정원의 한 모퉁이였다. 벽을 기던 벌레였고, 흙이었고, 일찍이 그곳에 세워져 있던 갈퀴와 대빗자루였고, 사라져버린 아라키 씨였고, 할아버지였고, 그곳에 흐르던 시간이었다.    - p.157, 158

 

 

 

야나기시마 일가를 통해 생각해 보는 가족이란 울타리와 그 안의 결국 혼자인 나를 들여다 보는 시간, 라이스에는 소금을!!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 8점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주)태일소담출판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