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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7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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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구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이라는 데에 눈이 갔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뭐, 대단히 중요한 사항은 아니므로 일단 페이지를 넘기기로 하자. 양 페이지 가장자리로 가지런히 자리한 차례가 등장했다. 장편소설의 소제목들인지, 단편소설들인 건지, 아님 에세이를 모아놓은 건지……, 역시나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어느 쪽이건 간에 '작품'들이 들어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생각해봐도 기이할 정도로 책을 손에 쥐고 있는 내내 '작품집'이라는 데에 사로잡혀 있었다. 번역가의 의견인지 편집자의 의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소설이건 에세이건 뭉뚱그려 말하는 '산문집'이라는 단어를 두고 굳이 '작품집'이라고 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문득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어느 작가의 오후』가 떠올랐다. 같은 독일어권 작가인데가가 '산책'이라는 공통된 테마 탓에 쉬이 연상된 것이었으리라. 마침 거기에 '<작품>이란 무엇을 뜻하는가?'라고 시작하는 대목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해당 책을 뒤적여 봐야만 했다.  

 

마치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페터 한트케가 뜻매김한 것만 같았다. 사실 『어느 작가의 오후』를 읽을 당시만 해도 뭔가 심오한 듯함에 표시를 해두긴 했지만, 온전하게 그가 말한 작품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 뒤,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을 읽고 나서야 그가 말한 '작품'의 정의가 놀라우리 만큼 와닿았던 것이다. 이것은 나로서도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작품>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재료란 거의 중요하지 않고 구조가 무척 중요한 것, 즉 특별한 속도 조절용 바퀴 없이 정지 상태에서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 p.40 페터 한트케, 『어느 작가의 오후』

 

 

 

『산책자』에 실린 42편의 작품들을 읽자면, 삶이 동반하는 그 어떤 음울함도 잠재우고 마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그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 안에서 마주하는 대상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았고, 그것에 대한 응답의 결과물이 그가 남긴 작품들이 아니었나 싶다. 「산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산책을 하다보면 수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데, 그것이 내게는 얼마나 아름답고 쓸모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라고. '발길 닿는 대로'가 주는 뜻밖의 즐거움을 충분히 알기에 그의 작품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문장들이 마음속에서 알알이 박힌다. 마치 걷는 행위를 통해, 인간 삶과 자연을 향한 존엄성을 확인하고 그에 수반되는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마치 '내 글은 나, 로베르트 발저가 일구어 낸 삶 자체입니다.'로 읽힌달까. 

 

깊이 매료됐다.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의 ― 조용하지만 결연한 의지로, 그러나 몹시 외로워 보이는 ― 여정을 거닐 수 있을는지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눈 덮인 겨울날의 앙상한 전망 속에서도 생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을까. 가능한 한 그런 영혼이고 싶다.

 

 

… 나는 가장 작고 가장 허름한 것만을 주시했다. 지극한 사랑의 몸짓으로 하늘이 위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하나의 내면이 되었으며, 그렇게 내면을 산책했다. 모든 외부는 꿈이 되었고 지금까지 내가 이해했던 것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표면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함으로 인식하는 환상의 심연으로 추락했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였으며,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진정으로 나 자신이었다.    - p.349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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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6 산책길에:)  

 

 

 

 

 

 

산책자 - 10점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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