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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7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임현 외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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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 01. 「고두(叩頭), 임현

 

인간에게 필연적이기 마련인 자기모순, 그 전형을 한 윤리 교사의 자기 옹호에서 읽는다. 오늘도 누군가는 용서를 구하기 위해 사과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기로 한다. 오가는 사과와 용서 속에 얼마큼의 진실과 진심이 담겨 있을까. 혹여 용서를 받아내고, 사과를 받아내는 것에 몰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덕이고 정의이고 올바른 세계'(p.26)라 믿어왔고, 또 그래야만 할 우리의 민낯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글이다.

 

무슨 잘못을 진짜 하긴 했는지, 그걸로 미안한 감정을 가졌는지의 여부는 아무 상관 없단다. 핵심은 그런 말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뿐이거든. 나는 그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식적이라고? 진정성이라든가 진심 같은 말을 나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걸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겠니? 진짜는 머리를 조아리는 각도, 무릎을 꿇는 자세에서 오는 것들 아니겠니?    - p.15

 

 

 

# 02. 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눈사람이 남긴 건, 물과 ― 머리카락 심어줬던 ― 흑미뿐. 이 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은 증발해 버리고, 습기를 머금은 흑미만이 남는다. 그런데 강윤희와 백아영은 그 흑미들을 드라이어로 말린 뒤,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이 일련의 행위가 나를 몹시도 불유쾌하게 만들었다. 삶에서 소진하고 남은 찌꺼기들을 인간은 왜 하나같이 말끔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건지. 그때 끊어버리고 지워버리고 꾸겨서 있는 힘껏 던져버리면 좋았을 것을, 조심스럽게 다시 펴고 이어 붙이며 꾸역꾸역 이고지고 가려하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너무 쉽게, 너무도 자주 목격된다. 그냥 없애 버리면 안 되는 걸까. 그러면 삶이 더 이상 삶이 아닌 게 돼버리는 걸까. 그런 생각 따위를 하게끔 한다.

 

"아영아, 민서 삼촌이랑 니가 만든 눈사람, 없어진 거 아니야. 그냥 모습이 변한 거야."    - p.80

 

 

 

# 03. 문상」, 김금희

 

희극배우는 정작 '삶'이라는 연기에는 익숙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한 무대에서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겉도는 것이다. 귀신 소리 내기는 것이 싫어서 어제부터 크리스찬이라니. 그냥 천역덕스럽게 연기할 순 없었던 걸까. 누군가와 똑 닮아 불쾌하고도 그 피곤함이 못내 안쓰럽다. 그런 자신이 나쁘냐고 묻는 것은, 그것을 제대로 연기해내지 못한 자책과 죄의식 때문이리라. 송은 그가 확실히 나쁘다고, 어차피 나빠질 운명이라고 했다. 송의 눈에 그것이 보였다면,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문상을 다녀온 송의 '악몽 같은 하루'(p.112)에 대한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문득 송이 양에게 했던 질문을 나 자신에게도 하고 싶어진다. "그래, 연극은 잘되어가고?"(p.115)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냐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나빠질 운명인 것이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    - p.107

 

 

 

# 04. 「고요한 사건」, 백수린

 

'나'는 ― 우리 가족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잠시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는 ― 소금고개에서 친구를 사귄다. 그러나 훗날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이라는 데에 의심치 않는다. 무엇이 그녀에게 그런 확신을 갖게 했던 걸까, 이것을 생각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자주 통화했고 어쩌다가 만났지만 점차 거의 만나지 않게 될'(p.150) 관계들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멀어진 인연이 존재해왔고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순간, 쓸쓸함을 넘어서는 씁쓸함, 서글픔을 느껴왔으므로. 또한 여전히 그런 인연이 존재할 것임을 알기에 그저 소설 속 이야깃거리로만 치부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런데 놀랍게도 눈앞에서 나를 현혹하는 무언가가 늘 그것을 지워냈다. 역시나 나는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p.155)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그런데 우리 삶에 외려 이런 망각이, 그런 가벼움이 없다면, 그건 너무도 가혹하지 않을까, 항변하고 싶어졌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그때 나는 창밖으로 떨어져내리는 아름다운 눈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집마다 매달려 펄럭이는 붉은 깃발들 사이로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는 풍경을, 그저 황홀하게.    - p.155

 

 

 

# 05. 호수 ― 다른 사람, 강화길

 

여성으로서 골똘하게 마음을 기울이게하는 소설이다. 여성이기에 감내해야만 하는 폭력, 그 공포의 순간들을 한 편의 글이 모호하면서도 낱낱이 서사하고 있다. "호수에 두고 왔어. 호수에."(p.173) 민영이 의식을 잃어가며 남긴 마지막 한마디를 따라 길을 나서야만 했던 진영을 나 역시도 따라야만 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의 손아귀에 걸려들었고, 호수 어딘가에서 허우적 대야만 했다. 대단히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조심했어야지. 그랬어야지. 그래. 그랬어야지. 그러게 호수에 왜 갔느냐고? 왜 왔느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신이 원한 거잖아요, 그래서 따라 들어온 거잖아요. 아니예요?    - p.201

 

 

 

# 06. 그 여름, 최은영

 

수이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며 감추고 싶어 했다. "나는 내가 무서웠어."(p.222)라고 고백하는 그녀 앞에서 이경은 이해의 어려움을 느끼지만, 이내 자신들을 바라보는 냉담한 시선과 마주한다. 소설의 여운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오히려 이경과 수이의 첫 만남과 그 이후에 대해서 그 어떤 특이점도 발견하지 못했어야 한다고. 그러나 '사이좋은 자매처럼'(p.220)으로 묘사된 관계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다른' 소설로 읽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 에 이상하리 만큼 집중해 버리고 말았다. 젠더의 이분법적 구분에 한정지어서 이 소설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저 사람과 사람이 감정을 가지고 만남 혹은 이별을 하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그러므로 무엇에 홀리듯 시작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만남과 배려를 가장한 욕심 그리고 관계의 위선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우린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이 되었어.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모든 게 다 변해버렸잖아. 넌 네 얘기를 나에게 하지 않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널 위해서 따로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넌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 네 잘못은 없어. 다 나 때문이야.    - p.259

 

 

 

# 07.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천희란

 

효주에겐 엄마였고, 선생님에겐 사랑했던 사람. 그러나 그녀는 일찍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죽음이 이어준 기이한 인연만이 위태롭게 존재할 뿐. 시종 담담하게 이어지는 문장 안에서 그들이 감내해야만 했던 혼란과 고통을 읽었다. 결코 놓여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봐야만 했다. 그들의 복잡한 감정들이 매우 섬세한 문장 안에서 심도 있게 읽히는 글이었다.

 

효주야, 네가 망치고 버려둔 화분에 나는 새 식물을 심고 길렀어. 망친 것을 거듭 망치고 또다시 기르는 동안에, 언젠가는 그 작은 식물이 내 안에 독처럼 퍼져 있는 너를 향한 어두운 감정을 모두 품은 채 꽃을 맺고, 낙화가 그것을 함께 거두어가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한 번도 꽃이 맺히는 것을 보지 못했어. 만일 그 화분이 꽃을 틔웠다면 비로소 내 기도가 이루어진 것일 게다. 나는 그걸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아. 이 악의를 더이상 숨기고 싶지 않구나. 그리고 나는 이제야 조금 자유로워진 것 같다.    - p.313,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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