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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3

눈 | 막상스 페르민 |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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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한 권의 소설이면서 한 편의 시가 되는 이야기

 

 

 

아직 누구도 밟은 일 없는 소복하게 눈 쌓인 너른 들판을 상상한다.

온통 눈부신 흰빛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그곳을 지나야 한다면, “태어나, 연기하다, 죽는 사람들”(p.122)의 내딛는 걸음걸음은 한없이 조심스러워질 테다. 어쩌면 자신이 남길 발자국을 기대하며 성큼성큼 나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를 쓰는 남자, 유코는 눈 속에 숨어 있을 줄을 찾아 그 위를 아주 신중하고도 대담한 걸음으로 내딛으리라. “삶의 줄 위에서 균형을 잡”(p.122)아야 하는 곡예사의 운명을 타고난 연유다. 그는 삶의 곡예사이자 언어의 곡예사가 되기 위한 걸음을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선생 소세키는 시인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그렇게 좇아야 한다고 일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시인의 눈에만 보이는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p.100)어야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덧붙이면서. 그리하여 유코는 기꺼이 곡예사가 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렇게 늘 “줄 위에 머물러 있었다. 눈으로 지어진.”(p.124) 

머릿속으로 그린 눈밭을 다시금 바라본다. 예술에 가닿기 위한 시인을 생각하며 시를 떠올린다. 어쩌면 내 삶의 줄도 이 눈 속 어딘가에서 제 자신을 알아봐 주길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상상 해본다. 어쩌면 그렇게 나도 내 삶의 시 한 편은 쓸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하면서. 그리하여 내 삶의 곡예사가 되기를 바라며.

 

 

“그러네. 시인은, 진정한 시인은 줄타기 곡예사의 예술을 지니고 있네. 시를 쓴다는 건 아름다움의 줄을 한 단어 한 단어 걸어가는 것일세. 시의 줄은, 한 작품의 줄은, 한 이야기의 줄은 비단 종이에 누워 있지. 시를 쓴다는 건 한 걸음씩, 한 페이지씩, 책의 길을 걸어가는 일일세. 가장 어려운 건 지상 위에 떠서, 언어의 줄 위에서, 필봉의 도움을 받으며 균형을 잡는 일이 아닐세. 가장 어려운 건 쉼표에서의 추락이나 마침표에서의 장애와 같이 순간적인 현기증을 주는 것으로 중단되곤 하는 외길을 걷는 일이 아닐세.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    - p.100

 

 

 

 

 

- 8점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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