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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3

작별들 순간들 | 배수아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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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비밀과 매혹, 기다림과 망각, 글쓰기와 언어,
그리고 한 권의 책

 

 

 

열네 편의 글 안에서 나는 열네 번의 산책에 동행하고 있었다. 내디딘 걸음걸음은 그 자체로 — 화자와 베를린 서가의 주인, 그리고 나를 포함한 — 우리의 순간들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느꼈다. 더욱이 혼자 있는 중에도 틈만 나면 머릿속으로 숲 속 울타리에 둘러싸인 정원 오두막을 떠올리곤 했는데, 왜냐하면 그 공간에 머물렀기에 비로소 가능해진 모든 순간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까닭이었다. 문장 따라 산책길에 나선 나 역시, 그 정원 오두막에 속해 있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도 근사한 경험이었다. 알지 못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고 잊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것들을 각성하게 만드는 한편 그 안에서 한순간도 멈춘 일 없이 모든 것들이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경이를 마주하게 한 연유였으리라. 작별 역시 “우리의 일생은 그것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p82)기라도 하듯 우리 삶에서 줄곧 마찬가지였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쩌면 우리가 스치고 거쳐간 모든 순간들이 그 모든 작별들과도 다르지 않음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 내가 맞이한 이 한 권의 책이 선사한 작별이 앞으로 내가 마주할 또다른 작별들, 순간들에 적이 영향이 있으리란 예감을 하면서.

 

 

 

우리가 평화롭게 정원의 흙 위로 몸을 기울인 동안, 당신의 몸 위로 빛과 그늘이 어지럽게 얼룩지는 그 순간에도. 작별은 바로 지금, 우리의 내부 — 숲안쪽 — 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었다.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몸을 구부리면서 당신의 목덜미 위를 느리게 기어간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집어올린다. 평화와 고요. 오직 빛과 호흡만이 있는 순간. 지금 당신이 불타고 있다는 증거인가? 글쓰기는 작별이 저절로 발화하는 현장이다.    - p.82, 83 「작별들」

 

 

 

 

 

작별들 순간들 - 10점
배수아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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