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후는 작업이 끝나는 순간 시작된다!
이 책은 작가가 12월의 오후, 그날의 작업을 마치고 집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특별한 사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길을 걸으며 마주하게 되는 풍경과 사람들을 묘사할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현실과 환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다분히 망상적 세계에서 허우적댄다. 그러므로 집으로 돌아온 길조차 정확하게 기억해내지 못한다.
두서없이 등장하는 현실과 환상의 이야기들 때문에, 읽으면서도 정신적으로 굉장히 소모적이었다. 나름 정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읽다가 다시 앞 문장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곱씹으며 다음 문장을 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인지 백 페이지가 조금 넘는 정도의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느낌상으로는 3권짜리 장편 소설이라도 읽은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그러나 애를 먹은 만큼 묘하게 끌리는 데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작가로서의 페터 한트케가 느끼는 자신의 오후를 풀어낸 글이라는 생각을 하니, 작품 속 세계와 현실 세계를 명확히 구분 짓지 못할 정도의 글쓰기에 대한 심취, 세상을 바라보는 그만의 자유로운 시선 그리고 적절한 단어를 취함으로써 탁월한 문장으로 이끌어 내는 필력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 이상의 노고가 수반된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의 열정을 봤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동시에 페터 한트케라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의 다른 글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작품>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재료란 거의 중요하지 않고 구조가 무척 중요한 것, 즉 특별한 속도 조절용 바퀴 없이 정지 상태에서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방에서 타자를 치며
활짝 열린 창밖으로 자신이 내는 소음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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