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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6

유년의 뜰 | 오정희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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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4

 

 

 

오정희 작가의 두 번째 창작집인 『유년의 뜰』. 1981년 출간 당시 작가는 후기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지나간 시간들, 그리고 현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강할 때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위안받는다. 나 역시 그렇다. 잠이 안 오는 밤, 나는 자주 생을 바쳐 훌륭한 작품을 남긴 이들을 생각하고 글에 대해 성실함이 생에 대한 그것이며 진실로 소중히 아끼는 것들을 사랑하고 지키는 확실한 방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p.266)"라고. 

 

지난 시간 정성스레 수놓아 완성한 글을 차례로 세상에 내놓으며, 마음 한 켠에 차곡히 쌓아뒀을 작가의 진심이 비로소 알알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다. 작가로서 수십 번, 수백 번 고뇌하며 그간 어떤 마음으로 펜을 잡았을지, 조용히 마음속으로 가다듬었을 다부진 각오와 의지의 면모가 자연스레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런 마음들이 소설에도 티없이 녹아내려 읽는 쪽에서도 한층 마음을 다해 한 문장 한 문장 곱씹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어쨌든 작가는 완성된 책을 보내며 이제 새로운 출발을 생각한다고 했다.

 

『유년의 뜰』은 표제작을 비롯해 「중국인 거리」, 「겨울 뜸부기」 등 총 8편의 중·단편 소설이 수록돼 있다. 그것들은 각기 독립된 이야기임에 분명 하나,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여성 주인공이 전면에 등장하고 소설의 차례에 따라 유년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인물의 이야기인 것만 같은. 배경이 되는 공간에서도 주변 인물에서도 그것에 대한 공통점은 찾을 수 없기에 어쩌면 억측에 가까운, 그런 인상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작가는 구석이 있다면, 전후 시대의 아픈 기억과 그로 인한 온갖 것들로부터의 부재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부재의 시대였던 그 시기, 이 땅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삶의 명맥을 잇게 했던 이들이 누구였는가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 아내와 누이가 겪었을 그 모든 것들이 『유년의 뜰』에 한데 녹아있고, 세대를 거쳐 우리는 여전히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알고있는 이유다. 말하자면, 한국 여인들의 보편적 정서가 농밀하게 배어 있기에 한층 그러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것, 비단 나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글을 읽으며 내내 주목했던 부분의 전부기도 하다.

 

 

 

나는 깜깜하게 엎드린 바다를 보았다. 동지나해로부터 밤새워 불어오는 바람, 바람에 실린 해조류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중국인 거리, 언덕 위 이층집의 덧문이 열리며 쏟아져나와 장방형으로 내려앉는 불빛과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 연한 봄의 숨결이 숨어 있었다. 나는 따스한 피 속에서 돋아오르는 순(荀)을 참을 수 없는 근지러움으로 감지했다. 인생이란……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뒤를 이을 어떤 적절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 p.97 「중국인 거리」

 

 

 

 

 

유년의 뜰 - 10점
오정희 지음/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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