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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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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 민음사 고루하고 위선적인 권위에 희생된 순수한 소년의 비극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짓밟는 제도와 교육에 대한 비판 소년 한스 기벤라트는 총명했고, 그런 까닭에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재능 있는 아이라면 의례히 나아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을 향해 내디뎠다. 그것은 곧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는 일이었는데, 입학의 기쁨과 밝은 장래에 대한 설렘도 잠시, 신학교 생활은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온 지난날의 삶을 전복시킨다. 결국 신경쇠약 증세로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더는 주위에서 격려하던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냉엄한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그 파국의 여정을 좇으며 수레바퀴 아래서 있던 젊은 영혼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물론 어느 누구도 한스가 잘못되기를 ..
명상 살인 | 카르스텐 두세 | 세계사 죽여야 사는 변호사 누구도 이런 살인은 상상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비요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 이야기가 처음에는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한 모든 일은 최선의 행위였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맞추려 집중을 택한 자의 논리적 결과였다.”(p.10)라고. 처음 읽었을 때는 흘러가듯 지나쳤지만,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지금에서 다시 읽은 이 문장은 한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인 동시에, 실은 우리 스스로 역시 일상 속에서 자주 범하고 마는 어떤 나약하고도 비겁한 지점에 대한 순간을 상기하게 했던 이유였을까. 어찌 됐든 나는 주인공 비요른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순간의 감정에 그치지 않고 실행에 ..
모모 | 미하엘 엔데 | 비룡소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서있는 숲에 자리한 낡은 원형극장에 사는 모모. 이 소녀 곁에는 청소부 할아버지인 베포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청년 기기 등 소중한 친구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간을 훔치고자 하는 회색 신사들의 농간에 모모의 친구들은 점차 시간에 쫓기며 웃음기 사라진 생활을 하게 된다. 이에 모모는 시간을 나눠주는 호라 박사와 거북 카시오페이아의 도움을 받아 그들로부터 시간을 되찾고자 모험을 시작한다. 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 비밀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 비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비..
데미안 | 헤르만 헤세 | 문학동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건강한 자아 형성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훗날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는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데미안』 속 에밀 싱클레어 역시 십 대 시절, 혹독한 내면 성찰의 시기를 거친다. 그것은 부모님이 계신 좁지만 안락한 낮의 세계와 그 경계 너머의 어둠과 폭력이 난무하는 밤의 세계를 인식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서로 극과 극이면서도 놀라우리만큼 밀착되어 있고 심지어는 혼재되어 있기까지 한 두 세계에서 싱클레어가 느끼는 혼란과 불안은 그의 유년을 치열하고 투쟁적으로 만들지만, 그 과정 안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가기에 결코 부질없는 일만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열중해 ..
좀머 씨 이야기 | 파트리크 쥐스킨트 | 열린책들 수수께끼 같은 좀머 씨 『좀머 씨 이야기』는 나무타기를 좋아하는 한 소년의 성장을 담은 소설이다. 사시사철 똑같은 배낭과 지팡이를 들고 어디론가 바쁜 걸음을 내딛는 수수께끼 같은 좀머 씨. 그런 그를 꿈속에서 조차 마주할 정도로 소년은 좀머 씨에게서 호기심을 느낀다. 그러나 소년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좀머 씨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혼자만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이후, 나무를 타며 하늘을 나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 여겼던 어린 시절을 통과한 소년은, 더 이상 나무에 기어오르는 일이 없어질 만큼 성장했다. 그 무렵 우연히 호수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좀머 씨의 모습을 발견하지만 조용히 지켜만 본다. 훗날 사람들은 사라진 좀머 씨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지만, 소..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크 쥐스킨트 | 열린책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됐던 건, 『향수』를 통해서였다. 도입부부터 정신없이 빠져들게 했던, 그래서 이 책, 그러니까 『깊이에의 강요』 마지막에 있는 짧은 에세이, 「문학적 건망증」에서 말하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향수』만큼은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단편 소설 3편과 에세이 1편으로 이루어진 얇은 책이기에 가볍게 생각하고 선 채로 표제작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쩜! 대학생활 내내 내 마음을 어지럽히던 그 이야기가 여기에 활자로 적혀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쓰인 글이 마치 방금 내 손을 거쳐 마지막 문장의 잉크 자국이 마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꽤나 서늘한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예술가, 그러니까 창작을 ..
어느 작가의 오후 | 페터 한트케 | 열린책들 나의 오후는 작업이 끝나는 순간 시작된다! 이 책은 작가가 12월의 오후, 그날의 작업을 마치고 집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특별한 사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길을 걸으며 마주하게 되는 풍경과 사람들을 묘사할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현실과 환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다분히 망상적 세계에서 허우적댄다. 그러므로 집으로 돌아온 길조차 정확하게 기억해내지 못한다. 두서없이 등장하는 현실과 환상의 이야기들 때문에, 읽으면서도 정신적으로 굉장히 소모적이었다. 나름 정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읽다가 다시 앞 문장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곱씹으며 다음 문장을 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인지 백 페이지가 조금 넘는 정도의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느낌상으로는 3권짜리 장편 소설이라도 읽은 듯한 기분이..
향수 | 파트리크 쥐스킨트 | 열린책들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지상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스물다섯 차례의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광기 어린 천재,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삶을 그리고 있다. 최고의 향수를 만들겠다는 일념이 빚어낸 그의 녹록지 않은 삶의 여정이 굉장히 속도감 있게 전개가 되고 있어 지루할 틈 없이 빠져든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무엇보다 결말이 꽤 인상적이다. 그루누이가 자신이 만든 향수를 온몸에 뿌리자, 부랑자들이 몰려들어 그의 육신을 없앤다는 설정은 파격적이면서도, 삶에 대한 인간 존재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결말인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고 싶어 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 특히나 혐오하는 대상에 조차 인정 받고자 하는 우리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애처로움마저 느껴지는 건 비단 나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