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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5

파크 라이프 | 요시다 슈이치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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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무언가가 항상 시작되고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꽤 오래전 일본 드라마 동경만경(東京湾景)을 우연히 보고, 요시다 슈이치가 이 드라마 원작 소설의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시간을 때우려고 들른 도서관에서 펴 든 책 또한 공교롭게도 그의 소설, 『여자는 두 번 떠난다』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후,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기억은 없다. 그런데 마침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었던 「파크 라이프」가 최근 재발간 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참에 읽어보기로 한 것.

 

아. 그리고 공원을 배경으로 해서 더 끌렸다는 점도 말해둬야 할 것 같다.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공원'이라는 장소는 어쩐지 마음을 놓이게 하는 감각으로 내 안에서 존재하는 까닭에 그것만으로도 읽어보고 싶은 이유를 충족했달까. 덕분에 그 동안 내가 공원이라는 장소에 이끌렸던, 하지만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아 불분명했던 답 하나는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

 

 

 

 

 

 

"왜 모두들 공원으로 올까요?

"마음이 놓여서겠지.
그렇잖아, 공원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누구도 책망하지 않아.
오히려 권유나 연설처럼 뭔가를 하려 들면 쫓겨나지."

- p.81, 82 「파크 라이프」

 

 

 

 

 

# 01. 「파크 라이프」 

‘나’는 히비야 공원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직장 선배 곤도 씨가 등 뒤에 서 있다고 착각하고는,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 이후, 공원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고, 매일 점심 무렵 같은 장소에서 만남을 거듭한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삶의 풍경 안에서 사소한 것 하나도 알 길 없는 완벽한 타인이지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유독 낯익게 되는 얼굴을 발견하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 물론 그런 반복되는 마주침에 무감각할 적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어제도 뵀는데, 여기서 또 만났네요' 같은 식으로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더러는 있지 않은가. 「파크 라이프」 속의 '나' 또한 거듭된 만남 그 자체에 대한 신기함으로 덥석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부터 건네는데.

 

 

공원 벤치에서 오랜 시간 멍하니 있다 보니, 풍경이란 실은 의식적으로만 볼 수 있는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파문이 번지는 연못, 이끼 낀 돌담, 나무, 꽃, 비행기구름, 그런 모든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상태는 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고 뭔가 한 가지, 예를 들면 연못에 떠 있는 물새를 본다고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진 물새가 물새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 p.29, 30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사실은 이들의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도 끝내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는 데에 있다. 이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돼 있는 사회관계망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지만, 의외로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있는 듯한 인상을 자아낸다. 결국 인간은 고독하게 살아가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달까. 그러나 그 안에서도 작은 희망은 있다. 소설 막바지에서 "좋아. ……나, 결정했어."라고 중얼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의 '묘하게 확고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 속 '나'가 그랬듯, 「파크 라이프」를 읽은 나까지도 어째서인지 지금 막 뭔가를 결정한 것 같은 기분이 전해졌으니까. '묘하게 확고한 등'이 주는 그야말로 묘하게 확고한 기운이 나에게로 까지 스미는 것 같은….

 

 

 

# 02. 「플라워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이 강하다. 그것은 철저하게 바깥으로만 드러난 것을 묘사했던 「파크 라이프」와는 달리,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그들 간에 좁혀질 수 없는 내면의 갈등과 대립을 그린 이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 특이할 만한 점이 있다면, 꽃이 가진 저마다의 성정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들을 한데 어울리도록 하는 꽃꽂이라는 행위와 밀착시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는 흐름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꽃의 수만큼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다.    - p.149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러면에서 꽃과 대비된다. 꽃꽂이의 경우, 수반 위 구체 안에서 안정감 있게 꽂히는 꽃들과 달리 인간들은 서로의 좁혀지지 않는 생각 안에서 저마다 고립된 채 고독할 수밖에 없는 점이라던지, 꽃이 지닌 아름다움과 대비된 인간의 비도덕성으로 얼룩진 추함이 그러하다. 그러기에 표현 방식의 차이와는 별개로 「플라워스」를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는 「파크 라이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꽃의 수만큼 사람에게는 무수한 감정이 있고, 그런 감정을 지닌 무수한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

 

 

 

요시다 슈이치의 시야에서 섬세하게 그려진 「파크 라이프」와 「플라워스」.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밋밋할 것 같은 이 짧은 글에 나와 우리가 각기 고독하게 영유해 가는 삶의 풍경을 무섭도록 다 담아놓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오랜 무더위 끝에 찾아온 서늘한 바람이 조금은 낯선 이 시기에 어울리는 글이라는 생각이다.

 

 

 

 

 

파크 라이프 - 8점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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