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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7

디어 라이프 | 앨리스 먼로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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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단편 작가, 우리 시대의 체호프
앨리스 먼로의 최신작이자 마지막 걸작!

 

 

 

작년 이맘때쯤 앨리스 먼로의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읽고 감탄했던 그 여운을 되도록 오래 담아두고 싶었다. 더욱이 절필을 선언한 그녀이기에 한정된 단편들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마지막 단편집인 『디어 라이프』를 곁에 두고도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빙빙 두르고 둘러 오늘이 왔다. 그녀의 짧지만 긴, 은은하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루 한 편씩, 이 주간에 걸쳐 읽었다.

 

역시나 두 말할 필요 없이 예찬할 수밖에 없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이 이루는 앨리스 먼로의 세계는 자칫 무미해 보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감정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영유하는 일상과 풍경 그리고 삶을 한 걸음 뒤에 선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장황하게 활자로 적고 있지는 않다. 외려 절제된 문장으로 단순한 '보여주기'를 통해 활자 바깥의 무한한 세계로 독자들을 이끄는 식이다. 그래서 마침표를 찍은 문장 뒤에서 독자는 쉼 없이 ― 그게 어디든, 비록 각자가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더라도 ― 어디로든 나아가야만 한다. 나는 그런 무한의 힘을 가진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이 그 어느 방대한 분량의 장편보다도 더 위대한 장편인 것만 같다.

 

참고로 『디어 라이프』에는 총 14편의 단편 ― 「일본에 가 닿기를」, 「아문센」, 「메이벌리를 떠나며」, 「자갈」, 「안식처」, 「자존심」, 「코리」, 「기차」, 「호수가 보이는 풍경」, 「돌리」, 「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 ― 이  수록돼 있다. 그 중 마지막 네 편은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자전적이지만 때때로 사실적인 측면에서는 꼭 그렇지 않은, 작가의 내밀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 01. 「일본에 가 닿기를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인 그레타는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거짓 없는 사실'을 좇는다. 그리고 다가올 일을 담담하게 마주하고자 한다. 그 지점에서 그녀가 느꼈을 쾌감 혹은 죄책감, 그 사이에서 감당해야 했을 혼재된 심리가 ― 마치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일련의 ― 사진 몇 장에 의지해 알아가듯 하는 인상이다. 어찌 됐든 그날 그 순간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든 간에 그녀 인생에서는 하나의 '전환점'이 됐을 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흐름을 따라가는 것. 자신을 내맡기는 것.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내맡기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머리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에 세워진 벽이 무너져야 했다. 진실함에는 그것이 요구되었다.    - p.29

 

 

# 02. 「아문센

 

결혼 대신 헤어짐을 택한 이후로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는 토론토 어느 북적이는 길 위에서 앨리스터를 마주친다. 그 찰나에 느꼈을 '나'의 감정이 간결한 문장 안에서 한층 빛을 발하는 느낌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지워졌으리라 여겼던 감정이 한순간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는 것, 그럼에도 가던 발걸음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아주 민첩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졌던 것. 그녀의 마지막 ― 약간은 체념한 듯 자조적인 목소리의 ― 한마디마저도 내 귀에 나지막이 들려오는 듯싶다.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 p.88

 

 

# 03. 「메이벌리를 떠나며

 

결핍과 상실의 연속인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당장은 그것들로 인한 무게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기라도 하듯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결국 어디론가 발걸음을 떼어야만 하는 우리의 모습을 말이다. 레이는 리아를 지켜보며, '그녀는 그저 딱 필요한 만큼만 마음을 썼다.(p.98)'고 떠올린다. 어쩌면 ―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영악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 삶을 큰 부침 없이 지속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곧 밖으로 나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발 한 발 내디딜 평범하고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 p.117, 118

 

 

# 04. 「자갈

 

벗어나고 싶지만, 이미 마음 한가운데 깊이 뿌리 내려서 어쩌지 못하고 떠안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나'에게는 어린시절 물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달려가 몸을 던지던 카로의 마지막 모습이 꼭 그렇다. 장난 같던 그날의 사고 기억에 '이제, 안녕', 이별을 고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는지…. 나는 절대로 불가능할 것만 같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 p.142

 

 

# 05. 「안식처

 

'나'는 부모님이 가나로 떠나고 이모댁에서 머물게 되면서 자신의 엄마와는 사뭇 다른 돈 이모를, 그녀의 삶을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자식이 없는 이모는 늘 자신보다는 재스퍼 이모부의 생각과 의견을 우위에 둔다. 마치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남편을 위해 안식처를 만들어주는 것이다.(p.149)'라고 적힌 어느 잡지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는 듯. 하지만 반전은 있다. 이모부 자신보다도 오히려 이모부를 더 잘 아는 이모에게서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감지된 것이다. 삶의 연륜이 깊은 여성 작가이기에 가능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모는 이모부 얼굴에 깃든 실망의 그림자를, 이모부 자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먼저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처음으로, 그게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이제 그러려고 해도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 p. 171

 

 

# 06. 「자존심

 

때때로 성급한 판단으로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잃기도 하는 미숙한 삶이지만, '의지만 있다면 어떤 일도 좋게 만들 수 있다(p.176)'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나'와 오나이다는 도심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스컹크 무리가 마당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며 황홀해한다. 온전하게 그것에만 집중해서. 찰나의 순간을 감각하고 나아가 공유할 수 있다는 ― 삶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 기쁨의 한 면모를 보여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일상을 이어가게 하는 포근한 힘이지 않을까.

 

그때 나는 생각했다. 오래 살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그냥 해결된다고. (…) 모두의  얼굴이 고통을 경험했다. 당신의 얼굴만이 아니라.    - p.197

 

 

# 07. 「코리

 

코리는 하워드(유부남)와의 만남을 지속하기 위해 릴리언의 입막음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돈을 보냈고, '죄스러운 관계(p.218)'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릴리안의 죽음을 계기로 코리는 자신이 하워드에게 속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기만 행위를 따져 묻는 대신 스스로의 가슴에 구멍 하나를 더 용인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그녀 역시 떳떳지 못한 관계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쉬이 끊어버릴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처한 현실에 대하여 진지하게 이야기 나눌 사람이 그녀 곁엔 아무도 없다는 사실만이 크게 보인다.

 

새들이 모두 날아가버린 것을 깨닫는 그런 아침은 항상 존재한다. 그녀는 뭔가를 깨달았다. 자는 동안 깨달았다.    - p. 226

 

 

# 08. 「기차


잭슨의 발걸음은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반대로 향한다.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날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린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랬고, 벨이 있는 병실에서 나와 잠시 산책에 나섰던 날에도 그랬다. 그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계모의 놀림에 집을 나갔다가 붙잡혀 돌아왔던 날이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짐을 꾸려 낯선 곳에서 내렸고, 그곳에서 일자리를 찾으려 한다. 머지않아 그는 또다시 짐을 꾸릴 것이고, 새로운 환경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가 기대한 것은 오직 공허일 것이므로.

 

모든 것은 가두어 잠가버릴 수 있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결심뿐이다.   - p.278

 

 

# 09. 「호수가 보이는 풍경

 

살아 있던 남편은 죽었고, 운전을 하던 자신은 더이상 그럴 만한 처지가 아니다. 꿈에서 깬 탓이다. 그 순간에 ― 요양원에서 지내는 ― 낸시가 맞닥뜨렸을 상실과 허탈한 마음에 대하여 상상해본다. 현실의 뿌연 기억과 달리, 꿈 속의 모든 것들은 그녀의 발밑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꿈 속이 아닌 곳에서도. 그것이 그녀가 느꼈을 감정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이유다.

 

"당신은 어떤 일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지금보다 과거에 더 잘 이해된 적이 있나요?"    - p.294

 

 

# 10. 「돌리

 

노부부의 삶에 한 여자가 끼어든다. 말벗이나 할까 해서 집에 들였던 여자(돌리)가 남편(프랭클린)과 과거에 인연이 있었던 것. 그 사실을 안 뒤부터 '나'는 여자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남편마저 의심하며 절망한다. 머지않은 죽음을 상의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도 '나는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p.330)'고 고백할 정도로 있는 힘껏 질투하고 분노할 수 있는 그녀의 사랑, 삶에 대한 열정이 조금은 놀랍다.

 

… 나는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존경스러울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함께했던 삶 전체가 그랬다.    - p.330

 

 

# 11. 「시선

 

세이디가 죽었다. 어머니는 죽은 그녀의 집을 나오면서 "너한테는 잘된 일이야.(p.350)"라고 말한다. '내'게 남동생이 생기고 어머니의 존재가 줄어들던 무렵, 빈자리를 채워주던 그녀였다. 어머니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너 세이디를 좋아하지?(p.341)"라고 물었던 어머니의 의중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어머니는 굳이 입 밖으로 꺼냈어야 했을 만큼 확인이 간절했던 걸까. 그래야만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던 걸까. 그러나 자신의 딸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 아닌지 생각(p.337)'할 줄 알고,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만큼 똑똑(p.337)한 아이였던 것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붙잡힌다.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 내 눈앞에 커다란 철망이 내려오는 장면이 떠올랐다. 철망을 둘러싼 작은 악의 피조물들이 당신을 겹겹이 에워싸고 당신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 당신의 숨통을 조인다. 세이디가 내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 내 얼굴에 그런 것이 드러났을 것이다. "이 세상에 무서워할 건 없어. 자기만 조심하면 돼."    - p.341

 

 

# 12. 「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의 불안한 '내'가 있다. 사실은 '그저 어떤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p.361)에 '어쩔 수 없(p.362)'던 밤이었다. 아버지는 방에서 나와 집 밖을 서성이는 내 게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p.368)'다고 말한다. 따져 묻지도,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여 대처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만 한다. 아무래도 그 한마디가 오늘도 잠 못 이루고 뒤척일 누군가에게 필요한 한마디일 것 같다.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지만 그것들은 이내 사라진다. 살다보면 그렇게 된다.    - p.369

 

 

# 13. 「목소리들

 

유년시절, 엄마를 따라 댄스파티에 간 적이 있던 '나'는 때때로 그날에 만났던 사람들을, 그들의 목소리들을 떠올리곤 한다. '그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의문들(p.378)'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그날, 그 광경이 주었던 마음의 자국이 어른이 된 지금에까지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들이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p.389)'던 이유였을 것이다. '내'가 그 목소리들을 떠올리며, '나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확인(p.389) 받았던 것처럼.

 

내 흥미를 끌었던 것은 페기가 아니라, 그녀의 눈물이 아니라,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많이 떠올리게 했다. 내가 감탄했던 것은 그녀를 위로하는 청년들이었다. 그녀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그들의 모습이었다. (…) 다 괜찮아, 페기, 그들이 말했다. 자, 페기, 괜찮아. 괜찮아.    - p.388

 

 

# 14.  「디어 라이프

 

유년 시절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어머니를 정말 견딜 수 없어하고 아버지가 나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던(p.414)' 시기였다. 아버지의 사업은 망했고 어머니는 파킨슨병이 발병해 건강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절망적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것을 알아채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였으리라. 훗날에서야 그 시절을 회상하며 절감한다.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용서가 필요한가에 대하여.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 p. 416

 

 

 

 

 

디어 라이프 (반양장) - 10점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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