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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1

여름 | 이디스 워튼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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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미국 문단에서 여성의 성적 열정을 다룬 최초의 본격 문학

 

 

 

열여덟 살의 소녀 채리티가 어엿한 여성으로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디스 워튼의 소설, 『여름』.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싱그러운 여름날 채리티 앞에 나타난 건축가 하니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숭고한 계절의 흐름은 때가 되면 여름을 보내줘야 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마찬가지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결단한다. 자신을 산에서 데려온 후견인 로열과 미래를 함께하기로.

앞서 말했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만남과 사랑, 헤어짐의 과정 안에서 드러나는 채리티의 심리적 성장에 있다. “모든 게 지긋지긋해!”(p.8)라며 불만하는 것으로 등장하던 소녀가 다른 여인과 약혼한 연인에게 오랜 고심 끝에 보낸 몇 줄 편지에는 그로 인한 자신의 슬픔과 상처는 잠시 접어두고, 상대방에 대한 은근한 걱정을 드러내며 ‘오히려 나는 당신이 옳게 행동했으면 하는 마음이야.”(p.203)라고 덧붙이는 것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마음에 품고 사랑했으면서도 놓아주어야만 했던 채리티가 감내했을 치열한 내적 고민 끝의 변화임을 모르지 않기에 그녀의 심리적 불안을 넘어선 성숙의 모습이 한결 마음에 와닿는 것이리라. 더욱이 산에서 태어난 자신의 신분에 맹목적 부끄러움을 느끼던 지난날과 달리 자신의 과거와 기꺼이 마주하고자 하며, 나아가 고귀한 한 사람의 존재로서 자신을 바라보며 타인 역시 마찬가지로 등등하게 바라보려는 그녀의 마음은 처음과는 적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비로소 성숙한 여인이 되어 로열과 맞이한 ‘차가운 가을 달빛’(p.264)이 마음 한 켠을 이토록 시리게 하는 건 왜일까. 아무래도 하니에게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리면서도,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할게.’(p.262)라 적었던 그녀의 - 차마 숨길 수 없는 – 진심이 마음 한 켠에 가시처럼 걸린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채리티는 하니보다 이 작은 집에 도착하는 것이 언제나 기뻤다. 그의 첫 입맞춤이 이런 것들을 모두 지워 버리기 전에 은밀한 달콤함을 하나하나 자세히 음미할 시간을 갖고 싶었다. 풀밭 위에서 흔들리는 사과나무 그림자며, 길 아래쪽에서 호두나무가 둥근 꼭대기를 점점 더 둥글게 부풀리는 것이며, 오후 햇살에 서쪽으로 기울어진 들판 말이다. 그 조용한 장소에서 보낸 몇 시간과 관련 없는 것들은 하나같이 어떤 꿈을 기억하려고 애쓸 때처럼 어렴풋하기만 했다. 그녀의 새로운 자아가 신비롭게 펼쳐지는 것, 그녀의 오그라든 덩굴손이 빛을 향해 손을 뻗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채리티는 지금껏 감수성이 시들어 버린 듯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왔다. 처음에 하니의 애정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그 애정의 일부라고 할 언어였다. 늘 사랑이란 혼란스럽고 비밀스러운 무엇이라고 생각해 온 채리티에게 하니는 사랑을 여름 공기처럼 밝고 싱그러운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 p.165, 166

 

 

 

 

 

여름 - 8점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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