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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3

젊은 느티나무 –강신재 소설선 | 강신재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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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강신재 소설선

 

 

 

1950, 60년대 한국의 대표적 여성작가 강신재의 중단편집으로 표제작인 「젊은 느티나무」를 비롯 총 열 편이 실려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처해있는 난처한 삶 속에서 제 나름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지만, 속 시원한 결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들 자신의 나약함 혹은 어리숙함이라기 보다는 가정과 사회 안에서 여성이라는 존재에게 부여되고 허락된 역할의 시대적 한계에서 기인한다고 이해해야 할 성싶다. 다만 그럼에도 그들이 마냥 제 처지를 자조하고 체념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희미한 희망을 본 듯도 하지만 말이다. 「안개」에서 성혜는 남편의 눈을 피해 쓴 소설이 유명 잡지에 실리자 기뻐하면서도 불쾌해 할 남편을 떠올리며 안절부절못했고, 「해방촌 가는 길」의 기애는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미군 부대에서 일하며 엄마와 남동생을 부양해야 했으며, 「양관」의 유진과 유선 자매는 각기 이혼과 사별로 남편을 잃은 뒤 무기력하게 지내던 중 젊은 수리공이 등장하여 유진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정작 유진은 유선을 일으켜 세울 “아무라도 좋은 누군가”(p.152)로 그를 떠올렸고, 「황량한 날의 동화」 속 명순은 약대 동창이자 우수한 학생이었던 한수와 결혼하지만 아편 중독인 그를 대신해 약방을 운영하며 역시 동창이었던 세연의 은근한 구애도 거절하며 남편 곁에 머물렀다. 또한 남녀 간의 순수하고 애틋한, 때로는 욕망과 집착으로 어그러진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젊은 날 작별을 고했던 첫사랑과 재회하지만 자신의 병세에 그를 거부하는 「절벽」의 경아와 엄마의 재혼으로 오빠가 된 현규에게 사랑을 느끼는 「젊은 느티나무」의 숙희, 오랜 구애를 비로소 허락한 여자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흐뭇하게 받아들이는 남자의 마지막 행적을 그린 「강물이 있는 풍경」, 여고 동창 옥례의 웃음 속 점액같은 끈적함을 후일 재차 마주하며 그녀의 사랑을 향한 집착과 광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점액질」의 나가 그렇다. 한편 등장하는 인물 수만큼이나 다양한 여성 인물상을 보여주는 「이브 변신」의 경우, 노망이 나 뒷방에서 생활 중인 노할머니와 방탕한 영감을 원망하며 밖으로만 쏘다니는 애자, 헤어진 남자 중현을 잊지 못하고 정신을 놓은 딸 난아와 남편이 얼마간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 무관심한 며느리, 그리고 남자가 싫다 말하며 주제넘게 참견하다 결국 내쫓기는 식모 아가다까지. 이 집안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어딘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처로운, 그리하여 저마다 불행을 안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깊은 애환을 보여줌에 인상적이었는데, 「파도」 역시 영실을 중심으로 언니 신실과 친구 순희, 성아 등 불행한 가족사, 부인과 첩 사이의 갈등 등을 다룸으로써 시대적 풍파 속 가혹한 운명에 처해 있던 여성들의 삶, 그들의 정체성을 묻게 하는 소설이었다.


 

성혜의 눈에 비친 형식의 모습은 한 개의 기괴한 피에로였다. 언제나 하듯 그대로 생각 밖에 흘려버리기에는 너무나 우열(偶劣)한 피에로였다.    - p.31 「안개」

 

똑바로 자라나다오. 그것은 누나처럼, 근수처럼, 그리고 어머니처럼 되지 않는 일이다. 다른 무슨 방법을 발견하는 일이다. 너는 그것을 해낼 소질이 있을 듯해 보인다……    - p.62 「해방촌 가는 길」

 

‘죽음’은 둘이서 나누어 가져보아도 조금치도 가벼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통곡을 하는 대신 현태는 그런 산수를 풀이하고 있었다. 통곡을 하는 대신 그는 심장으로 끝없는 절벽을 더듬고 있었다.    - p.100 「절벽」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 울면서 하늘로 퍼져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 p.131 「젊은 느티나무」

 

‘무슨 상관일까 ……’ 그러나 문득 유진은 유선이 자기와는 좀 달리 그런 걸 썩 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병만 낫는다면. 그리고 소달구지에 고삐를 쥐는 사람이 필요하듯이 누군가가 그네의 고삐를 잡기만 한다면. 회초리를 울려 신호를 할라치면 그네는 내닫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아무라도 좋은 누군가가……    - p.152 「양관」

 

한수가 죽어버리고 그의 옆에 노트가 펼쳐져 있다면…… 노트에는 흘림글씨로 몇 자 적혀 있을 것이다. ‘정신이 맑은 새에 결행하겠다. 당신을 사랑한 증거라고 알아준다면 다행이다……’ 사랑? 그것은 얼마간 우스운 말이기는 하였지만 나쁜 말은 아니었다. 동화를 읽고 난 어른처럼 그녀는 미소했다. 세연 같은 청년은 그런 것을 소중히 알고, 언제까지나 밥 굶은 소년처럼 가엾은 눈을 하고 있는 것이다……    - p.172 「황량한 날의 동화」

 

여자는 가버렸다…… 신실이 형을 닮은, 하이칼라 냄새가 나는 여자는 가버렸다. 똑딱선을 타고서……    - p.339 「파도」

 

나는 남자라는 것이 싫다. 뭐가 좋아 그들하고 같이 사는지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    - p.342 「이브 변신」

 

“야 이놈아, 네 생각은 어떻데? 왜 죽었을 성싶으냐, 그 사람들이.” “아저씨가 말하셨지 않아요? 젊구 여쁘게들 생겼더라구. 그래서 죽은 거죠.”    - p.386 「강물이 있는 풍경」

 

지나간 세월 속에 일어났던 일들을 사람은 대충 잊고 살게 마련이고 더구나 그것이 자기와 직접 관련 없이 생겨나고 진행했던 일인 경우에는,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과거의 한 토막으로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로만 여기고 있다. 그러나 가다가는 크고 작은 우연이 작용하여서, 누구나 그처럼 간단히는 흘러간 과거로부터 놓여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케 하여준다. 흘러간 과거로부터 — 라기 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결코 인간은 놓여날 수 없다고 함이 더욱 적절할지 모르겠다.    - p.387, 388 「점액질」

 

 

 

 

 

젊은 느티나무 - 8점
강신재 지음, 김미현 책임편집/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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