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뉴욕의 세밀한 풍경화이자 작가의 자화상
19세기 뉴욕의 상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꽤 흥미로우면서도 여운을 남긴다. 특히나 작가의 세밀한 관찰력을 통한 사실적인 묘사가 인상적.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인 뉴욕 상류 사회에 온전히 녹아들 수 없었던 엘렌 올렌스카는 언제나 문제의 중심에 서 있다. 어느 순간, 엘렌 올렌스카에 감정이입을 하며 글을 읽어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째서였을까. "나는 자유를 얻고 싶어요. 과거를 모두 지워 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엘렌의 간절한 마음이 통해서였을까. 아니면 위선적 관습으로 가득 찬 숨 막히는 뉴욕 상류 사회의 희생양을 구해내고 싶은 열망이 내 마음 어딘가에서 꿈틀대고 있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위선과 허위, 쓸데없는 관습에 얽매인 현실에 당당히 맞서는 뉴랜드 아처의 결단력 있는 모습을 내심 바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갑갑한 관습의 틀 속에 순응하며 자신의 자리를 꼿꼿이 지키고자 이를 악물었을 메이를 떠올려 보니, 한편으로는 그녀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장남 댈러스가 생전에 어머니께 들은 "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간절히 원하던 것을 포기하셨다고요."라고 전하는 대목을 읽는 순간 역시나 올렌스카에 대한 아처의 마음을 읽고 있었으나,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던 메이의 모습에 마음이 짠해지기도 하고. 마지막 34장. 아처는 장남 댈러스와 함께 올렌스카가 지내는 파리의 아파트 앞까지 찾아가지만, 댈러스만 올려보내고 자신은 끝내 호텔로 발길을 돌린다. 특히나 올렌스카가 사는 5층 발코니를 바라보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대목을 읽으면서 올렌스카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도 아련했는지 읽는 내가 다 마음이 아팠다. 동시에 오랜시간 마음 한 켠에 담아왔을 그의 사랑이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이런저런 여운으로 책을 다 읽고도, 몇몇 체크해 뒀던 대목들을 다시 읽으며 찬찬히 곱씹어봤다. 올렌스카의 아파트 앞 벤치에서 한참을 앉았다가 발길을 돌렸던 아처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무언가 놓친 게 있다는 건 알았다. 인생의 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너무도 아득하고 불가능한 일로 여겨져서, 그걸 불평한다는 건 복권에 일등 당첨되지 않았다고 낙심하는 것과 같았다. 그 복권은 수천만 장이 팔렸고 일등은 오직 하나였다. 그가 일등에 당첨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엘렌 올렌스카를 떠올리면, 책이나 그림에 나오는 상상의 애인처럼 추상적이지만 고요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모든 것을 한데 모은 영상이 되었다. 희미하고도 끈질긴 그 영상 덕분에 그는 다른 여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세상이 말하는 충실한 남편이었다. 그리고 메이가 막내를 간호하다가 폐렴이 옮아서 갑자기 죽었을 때 그는 진실로 애통해했다. 그들이 함께한 오랜 시간은 결혼이 설령 지루한 의무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의무의 위엄을 지키기만 한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 위엄을 잃은 결혼은 추악한 취향의 전쟁터가 되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며 지난날을 명예롭게 추억했고 그것을 잃은 것을 애통해했다. 어쨌거나 옛 방식에도 좋은 것이 있었다.' - p.328, 329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지음, 고정아 옮김/열린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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