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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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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 이병률 | 문학과지성사 “조금 일찍 쓰련다. 찬란했다고.” 시집을 손에 쥐고 있는 동안 ‘찬란’이라는 두 글자 단어가 계속적으로 나를 흔들었다. 그것에 스민 옅은 슬픔 탓이었는데, 여태껏 내가 알아 온 것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 까닭이기도 했다. 온통 환하게 비추어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밝은 아름다움을 수놓으리라는 어떤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어서, 어느 모로 보나 슬픔과는 도통 어울릴 법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진정으로 살고자 애쓰는 이들만이 맞닥뜨릴 수 있는 어떤 감정의 일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하여 살아 있다는 것, 그로 인한 경이는 –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든 -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찬란한 것이라고. 살아 숨 쉬고 있기에 마주할 수밖에 없는 모든 필연적 순간들이 한..
여름의 빌라 | 백수린 | 문학동네 인생의 여름 안에서 마주하는 불가해라는 축복 비로소, 기어코 나의 작은 세계를 벗어나는 이들의 눈부신 궤적 어느 누구에게도 입 밖의 말로는 도무지 가닿을 길 없는 마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대개는 욕망이라는 파도가 현실의 바위에 부딪쳐 새하얀 물보라를 일며 부서지는 찰나에 발현하는 그런 마음들, 그러니까 작가 백수린이 그려낸 화자들의 심리적 균열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평온을 위협받는 와중에도 그들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소란하지 않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순간들을 흘려보낸다. 그리고 훗날 찬찬히 되짚어 봄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끝내 마주하고야 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거의가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데다가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불가항력의 것이기도 해서, 애당초 부유하다..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 백영옥 | arte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 백영옥백영옥이 우리 곁에 다시 가져온 추억 속 빨강머리 앤의 웃음, 실수, 사랑과 희망의 말들!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들이 아니라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byeolx2.tistory.com   나를 처음 사랑하기 시작하는 나를 만나다   수년 전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고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앤과의 추억에 한껏 마음이 동했던 적이 있다. 앤에게 여전히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 있어줘서 고맙고 또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 이후 앤 관련 전시가 있으면 찾아가 보기도 하고, 구태여 앤과 다이애나 피규어 커스텀에 열을 올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번에 만난 두 번째 이야기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은 초록 지붕의 집으로 가기 전, 그러니까 앤의 유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 무라카미 하루키 | 민음사 출간 35주년 기념 완전판 평행선을 그리던 두 이야기가 맞닿는 충격적인 결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교차하며 전개되는 형식 안에서 내심 어떤 접점을 발견하고자 내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안달할 일이 아니었다. 구태여 그리하지 않아도 우리 각자가 삶 속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 두 이야기로 스미는 까닭에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가닿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즉, 두 세계가 서로를 개의치 않고 나아가는 듯 보여도 결국은 한 가지, 그곳이 어디든 간에 나란 사람과 그 존재가 담고 있는 진심, 동시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까지도 감내할 수 있는 의지 혹은 용기에 대한 이야기로 모아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베네치아의 종소리 | 스가 아쓰코 | 문학동네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 스가 아쓰코 밀라노, 안개의 풍경 | 스가 아쓰코 기억 속 밀라노에는 지금도 안개가 고요히 흐르고 있다 안개 자욱한 밀라노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자니, 자연스레 한 여인이 배경 안으로 들어온다. 그 byeolx2.tistory.com 밀라노, 안개의 풍경 | 스가 아쓰코 기억 속 밀라노에는 지금도 안개가 고요히 흐르고 있다 안개 자욱한 밀라노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자니, 자연스레 한 여인이 배경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말간 눈동자를 반짝이며 조근 byeolx2.tistory.com 환상의 시간은 언젠가 어쩔 수 없이 현실로 회귀한다 끝없는 사유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춘의 초상 『밀라노, 안개의 풍경』,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에 이어 집어 든 『베네치아의 종..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 문학동네 순하고 여린 것들로 북적대던 아름다운 시절이 끝나고 찾아온 적막 그 세상에서 끝내 버릴 수 없던 어떤 마음과 그 마음이 남긴 몇 줄의 시 지난날 기행이 걸어온 어둠길은 오늘에서야 한줄기 빛을 되찾는다. 시를 쓸 수 있었던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았던 시절 이후, 끝없는 밤을 걷고 또 걸어야만 했던 그의 고행이 시대를 뛰어넘어 작가 김연수의 숭고한 손끝 작업을 통해 비로소 새날의 희망으로 가닿은 까닭이다. 대개 우리는 개인의 꿈을 좌초시키는 혹독하고도 암담한 현실, 그 안에서 인간은 무얼 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골몰하고는 한다. 그러니까 제각기 마주한 현실의 벽 앞에서 고민하고 아파하며 절망도 하는 것이다. 나는 시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 안에서 기행 그 자신이 바라고, 작가와 나를..
사람에 대한 예의 | 권석천 | 어크로스 저널리스트 권석천, 당신과 나, 우리의 오늘에 대해 질문하다 글을 마주하면서 한동안 나는 냉엄한 기분에 젖었다. 그가 바라본 세상과 사람을 향한 시선 안에서 각성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죄의식, 그로 인한 낭패감 탓이었다. 늘 자기 객관화를 염두에 두고자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합리화하며 무너지고 말았던 일을 스스로에게 조차 가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이중 잣대였다. 자신으로 인한 잘못은 은근슬쩍 넘기기도 혹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면서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히 따지려는 행태, 이것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져 있을 때의 불상사를 심심찮게 목도하며 한탄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더욱이 사회 정의를 입버릇처럼 외치는 사람들이 정작 안으로는 자신과 가족, 속한 집단의 일에는 서슴..
죽은 자의 집 청소 | 김완 | 김영사 죽음 언저리에서 행하는 특별한 서비스 엄연한 현실의 일임에도 도무지 믿기 힘들 때가 있다. 이게 진짜냐고, 차라리 픽션이라고 하는 편이 한결 납득이 가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 죽은 자의 집 청소, 이른바 특수청소라는 업이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가령 일본 소설 속 주인공이 맞닥뜨린 상황이라고 하는 편이 더 그럴싸한 느낌이었달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대개의 믿을 수 없는 현실의 이야기란, 일상의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마뜩잖은 구석이 있어서 – 의도를 가지고 있든 무의식이든 간에 – 비현실의 일로 미루어 두려는 심리 기제가 발동한 경우가 아닐는지. 말하자면 구태여 알고 싶지 않은 일, 차라리 모르는 걸로 치부하고 싶은 일들 말이다. 『죽은 자의 집 청소』를 손에 쥐고 있는 동안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