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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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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최승자 | 난다 32년 만에 증보하여 펴내는 시인 최승자의 첫 산문!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는 시인의 말에 폐부 깊숙이 찔린 기분이었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강렬했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과 이후의 『즐거운 일기』는 한동안 - 이라기에는 상당한 기간 동안 - 늘 내 가까이에 있었다. 가만히 돌이켜 보건대 그때의 나는, 나를 흔드는 바람과 애초에 그리 깊지 못했던 뿌리에 대한 감춰지지 않는 열패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데 필사적이었다. 말하자면, - 쥐어짜는 안간힘에 가까웠다고 생각하지만, - 내 나름의 저항이었다고도 생각된다. 그런 나날이어서 그랬을까. 그때에 만난 시인의 시는 호기롭게 다가왔다. 후련하고도 통쾌한 맛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유(類)의..
그 좋았던 시간에 | 김소연 | 달 나 여기에 좀더 있으려고 해 일찍이 감탄해 마지않았던 『마음사전』의 ‘마음’ 낱말 정의가 한층 돋보였던 것은 시인 특유의 감수성과 예리한 통찰력에서 연유한다. 그렇기에 시인이 떠났던 여행에 뒤늦게나마 동행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모로 여행이란 감수성이 더해져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고 깊은 통찰력이 바탕돼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마련이니, 시인의 여행길이 몹시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손에 넣은 여행 산문집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까닭인지 책장에 두고 어언 삼 개월이 흘렀다. 코로나(COVID-19)라는 전례 없는 어려움 속에 여행이 아득히 먼 일이 돼 버린 이유라고 치부하기에는 어찌됐든 나의 의지로 이 책을 손에 쥐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변덕..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 세계사 한국문학의 가장 크고 따뜻한 이름, 박완서 그가 남긴 산문 660여 편 중 가장 글맛 나는 대표작 35 작가 박완서를 떠올리면 단연 ‘한국문학의 어머니’라는 칭호부터 떠오른다. 여기에 더해, 내 마음속에서는 입담 좋은 할머니로 우뚝 서 있다. 단순히 물리적 나이차가 그즈음인 영향도 있겠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매몰되어 있을 적이면 늘 할머니의 너른 품, 때때로의 인간적인 모습에 친근함을 느끼곤 했던 까닭이다. 더욱이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격동의 시대, 그 생생한 이야기를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전해 듣고 싶은 작은 바람이 있었지만 허락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허기진 부분을 문학이라는 울창한 숲이, 그 안에서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류시화 | 열림원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여행해야 할 신비 가만히 코로나 직전까지의 근래 여행들을 떠올려 보았다. 실로 나의 여행은 새로운 세상을 보기 위해서도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만 아니면 좋겠다는 이를테면 탈출의 의미가 컸던 것이리라. 그런데 이제는 코로나19(COVID-19)로 인해 여행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마음만 먹으면 여력이 되는 한 떠날 수 있었던 나날의 소중함과 직면해야만 하는 순간에 이르고 말았다. 그것은 곧 지난 여행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즐거웠던 한때를 회상하는 일인 동시에 그간의 여행이 알맹이 없는 한바탕의 소비에 그치고 말았던 건 아니었는지 새삼 살피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 즈음에 마주하게 된 류시화 시인의 『하늘 호수로 떠..
다정한 매일매일 | 백수린 | 작가정신 빵과 책을 굽는 마음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에 엮인 짤막한 글들은 빵과 책이라는 언뜻 공통분모가 없어 보이는, 그러나 양 쪽 모두를 좋아해 마지않는 작가에 의해 유기적 관계성을 획득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빵을 굽고 소설을 써 내려가는 마음에 깃든 온기에 대하여. 그 안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허기진 몸과 마음을 넉넉히 달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작가의 소설 아닌 글들을 마주하면서 올해 초와 여름, 그녀의 두 권 책에서 만나온 소설 속 인물들을 떠올리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평온했던 일상 속 심리적 균열을 일으키는 감정들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응해 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각자는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자신이 맞이할 내일을 묵묵히 맞이하는 편에 서 있었던 존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지영 | 위즈덤하우스 나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의 기록 공지영 작가가 섬진강 근처로 보금자리를 옮기고서 스스로를 보듬고 사랑으로 감싸 안고자 노력해온 나날에 대해 풀어쓴 에세이집이다. 그렇기에 가만히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적잖이 마음 공부가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와닿았던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대목이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를 아끼기보다는 몰아세우기에 바빴던 지난날의 기억이 선연하다. 어쩌면 나는 일상에서 불가피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지치고 힘든 일들에 대하여 미워하고 성낼 대상이 필요했고, 그건 곧 나 자신이어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가장 쉽고 간단했을 테니까. 그러나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만큼 비극은 없다. 다른 누구도 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심보선 | 문학동네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시인이면서 사회학자이기도 한 이의 단상 기록은 그 어느 글보다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투명하게 비춘다. 그 안에서 각자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과, 가족, 지인, 그 밖의 모든 이들에 대하여, 그들이 서 있는 이 세계에 대하여. 개인의 일은 때로 우리의 일이 되기도 하고, 그리하여 사회와 시대의 일이기도 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의 일상 속 사유를 쉬이 흘려보낼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리라. 여담이지만,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라는 책 제목이 마음을 동하게 했다. 시인다운 인사말이라는 생각과 함께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안부를 진심으로 건넬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라는 안도감 때문이기도 했다. 시대가 불행할 때 시인의 역할이 중..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 백영옥 | ar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