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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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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요이의 시간 | 오리가미 교야 외 | 징검돌 일본 여성작가 5인이 술을 소재로 그 종류만큼 다채롭고 해가 갈수록 깊어지는 인생을 그려낸 단편집 술을 소재로 한 일본 여성작가 5인의 단편집이다. 권남희 번역가의 산문집 『스타벅스 일기』에서 “주량은 약하지만, 나도 술을 좋아해서 술 이야기를 번역하는 일이 즐겁기 그지없다”(p.19)는 문장을 읽고서, 나 역시 호로요이(기분 좋게 취한 느낌)의 시간을 애정하기에 더욱이 『낮술』의 작가 하라다 히카 외에는 초면인 작가 구성에 호기심을 느껴 읽어 보았다. 결과적으로는 신선하고 유쾌하게 읽었는데, 무엇보다도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는 사카이 기쿠코의 단편 「첫사랑 소다」는 나도 모르게 큰 웃음이 날 정도로 재밌게 읽어 그녀의 또 다른 소설 역시 소개되기를 기다리게 됐다. # 01. 「그에게는 쇼콜라와 비밀의 ..
버스데이 걸 | 무라카미 하루키(글)∙카트 멘시크(그림) |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X 카트 멘시크 아트 컬래버레이션으로 만나는 매혹적인 단편! 스무 번째 생일날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소녀. 평범한 하루를 보내리라는 예상과 달리 매니저의 병원 행으로 사장이 머무는 방으로 식사 서빙을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일 선물로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데. 새삼 매년 찾아오는 생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해마다 무언가를 기념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히 기억해야 마땅하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중의 하나가 바로 태어난 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성대한 축하를 받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평소와 다름없는 조용한 일상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버스데이 걸』의 소녀처럼 의외의 누군가로부터 예상치 못한 축하..
우동 한 그릇 | 구리 료헤이∙다케모도 고노스케 | 청조사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뭉클한 감동과 웃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기 쉬운 것이 요즘 세태인 까닭에 두 편의 이야기는 씁쓸하지만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세상에 정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은 냉소적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곳이고, 또 그 사회가 때로는 불협화음을 내면서도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곳곳에 타인을 배려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씨 따뜻한 이들이 존재하는 연유이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편의 이야기가 그러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먼저 「우동 한 그릇」에서 섣달그믐날 밤 우동집에 들어온 세 모자는 한 그릇을 주문하는데, 넉넉지 못한 형편 탓임을 알아챈 주인은 몰래 양을 넉넉히 해 테이블에 올린다. 더욱..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마음속에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해, 우리는 둘만의 비밀 도시를 만들었다 아주 오래전 소년은 소녀를 만났고 함께 도서관에서 일하며 높은 벽에 둘러싸인 세계를 공유한다. 그러나 이 모든 건 한낱 꿈에 불과했던 걸까. 지금 속해 있는 현실 속에서 소년은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또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 그러나 도서관 꿈만은 선명하게 꾸는 — 어떤 이끌림에 의해 사직서를 제출하고 도쿄를 떠나 깊은 산간지방의 도서관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거기서 전임 도서관장이었던 고야스씨와 은밀한 만남을 이어가며 오랜 시간 자신을 사로잡았던 꿈, 또다른 세계의 현실이기도 했던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된다. 그 안에서 자연스레 내 안의 세계를 떠올려본다. 저마다 사람들은 발 딛고 있는 세계와는 별개로 ..
몬테로소의 분홍 벽 | 에쿠니 가오리(글)∙아라이 료지(그림) | 예담 행복을 찾기 위해 몬테로소로 떠난 고양이 하스카프의 사랑스럽고 신비로운 여행 이야기! 고양이 하스카프는 꿈속에서 마주한 분홍 벽을 보고 단박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임을 직감한다. 그리하여 그곳, 몬테로소를 향해 길을 나선다. 이 여정을 좇는 가운데 고양이 하스카프의 용기에 자연스레 반하게 된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 나아가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임에도 현실의 나는 쉬이 그러하지 못하고 주저하곤 함을 떠올린 이유리라. 하지만 고양이 하스카프는 현재의 안락함을 과감하게 뒤로 하고 모험을 떠나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분홍 벽에 다다른다. 그러고는 비로소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행복”한 순간을 만끽한다. 이는 목표한 것을 성취해 낸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참된 기쁨일 것이다. 나..
침묵 | 엔도 슈사쿠 | 바오로딸 그리스도교 박해의 시련 속에 배교를 강요당한 고뇌의 여정 이교도의 나라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뿌리내리게 하고자 선교 활동에 나선 성직자들이 있었다. 1637년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 세바스티안 로드리고가 그중 한 사람으로 동료 신부인 프란치스코 가르페와 함께 마카오를 거쳐 일본으로 향했는데, 거기에는 앞서 떠난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에 대한 진위를 살피기 위함도 있었다. 그렇게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로드리고 신부가 마주해야만 했던 — 그리스도교 박해의 시련 속에 배교를 강요당한 — 고뇌의 여정을 따른다. 그 여정을 밟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레 하느님의 침묵에 대하여 묵상해 본다. “하느님께선 무엇 때문에 이런 괴로움을 내려주십니까?”(p.94) 읍소했던 기치지로의..
개인적 체험 | 오에 겐자부로 | 을유문화사 출구 없는 현실에 놓인 현대인에게 재생의 희망은 있는지 물음을 던지는 수작(秀作) 정녕 희망은 있는 걸까. 버드는 절망의 순간 희망을 물었다. “그런, 뇌 헤르니아의 갓난아기가 정상적으로 자랄 희망이 있는 건가요?”(p.38) 실은 스스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섣불리 장담해 줄 수 없으리란 것을. 그럼에도 그 순간 그는 희망을 물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그 지점에서 이 개인적 체험이 한 존재에게만 한정된 고통이 아닌 삶 속에서 저마다 어떤 식으로든 마주하기 마련인, 그리하여 — 확실한 절망 아닌 — 불확실한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공동의 체험으로 확장됨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비로소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아기를 살리고자 하는 대..
영리 | 누마타 신스케 | 해냄 상실의 시대, 인간 앞에 펼쳐진 대재앙의 그늘 곤노는 동성 애인과 헤어지고 발령받아 온 이와테 현에서 직장 동료로 만난 히아사와 − 청주를 좋아하고 낚시를 즐긴다는 공통분모로 − 차츰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히아사가 아무런 말없이 이직한 사실에 서운함을 느끼던 중, 대지진에 이은 쓰나미가 일어나고 그가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그의 행적은 지금껏 자신이 알아 온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에 마주한 진실 앞에서 곤노는 홀연히 오이데 강으로 향한다. 올해 들어 첫 낚시였고 첫 입질에서 낚은 물고기는 뜻밖에도 무지개송어. 그러고는 “한참 강가에 우뚝 서 있”(p.91)는다. 그때에 곤노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대한 파도 앞에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