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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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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 김연수 | 문학동네 소설이 시간을 상상하는 여덟 편의 방식과 이야기가 우리 삶을 바꾸어내는 경이의 순간 우리는 과거에 대한 기억과 경험, 이를 바탕으로 터득한 현실의 체험이 외부 세계와 맞닿는 중에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의 시간을 예감한다. 그렇게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그걸로는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삶이 단선적이지 않은 연유리라. 삶을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만 보아도 그렇다. 김연수 작가의 신간 소설집에 엮인 여덟 편이 그 좋은 예이다. ‘이야기’의 형태로 구현하는 삶, 그 안에서도 시간의 직선적 흐름에 구애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이들과 조우하게 하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자신과 외부 세계의 접점을 보다 능동적이면서도 다각적..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 창비 미스터리 같은 한 남자가 헤쳐온 역사의 격랑 아버지가 죽고 문상 온 조문객들을 맞이하면서 딸은 아버지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더듬어 본다. 살아온 나날에 비하면 고작 4년뿐인 젊은 날의 빨치산 활동이 제 자신은 물론 일가족의 삶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 장본인이었다. 빨치산의 딸이었던 그녀 역시 피해자였고 사과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버지가 걸어온 삶이 정녕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일이기만 했을까. 생전 아버지와 이런저런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외려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p.181)한 딸은 자신이 외면해온 아버지란 존재에 비로소 가닿는다. 그리고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바란 세상을 위해 몸 던져 애쓴 한 사람일 뿐이고, 이는 저마다 제 삶을 위해 분투해 온 모..
하얼빈 | 김훈 | 문학동네 세상에 맨몸으로 맞선 청년들의 망설임과 고뇌, 그리고 투신 짧기에 더욱 강렬했던 그들의 마지막 여정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p.166) 마음 깊숙이 품고 있던 ‘동양 평화’의 대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소설 『하얼빈』은 그 역사적 순간을 향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짧고도 긴 여정을 담고 있다. 이는 작가의 간결하고도 절제된 문장을 통해서 한층 빛을 발하고 있는데,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투신했던 안중근의 결연한 태도가 대표적이다. 더욱이 대한국인 안중근과 천주교에 입교한 신앙인 안중근이라는 상충된 가치로 말미암은 고민과 망설임,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믿음에 대하여 | 박상영 | 문학동네 나와 함께해온 소중한 이들과의 시간이 단단하다고 믿고 싶은 마음, 그 희망을 쥐어보려는 청춘들의 사랑과 눈물 불확실한 세계에 우리 각자가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를 향한 믿음뿐이지 않을까. 그러나 실상 그 믿음이란 것의 실체가 생각만큼 단단하지 못함을 모르지 않는다. 『믿음에 대하여』는 코로나 이후 삶을 지내며 한층 공고하게 다져진 한없이 연약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이란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연작소설이었다. 「요즘 애들」 사회 초년생의 고군분투는 눈물겹다. 수습 딱지 뗄 날을 고대하며 성실하게 할당된 업무를 수행하고자 함에도 사수의 기대치를 충족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것이다. 매거진 C에서 입사 동기로 만난 김남준과 황은채가 사수 배서정에게서 받은 부당한 대우는 그들이 요즘..
애쓰지 않아도 | 최은영 | 마음산책 애쓰지 않아도 마음을 나눠줄 수밖에 없던 시절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마음에 고이 품은 무언가를 위하여 비로소 성립 가능하던 ‘애쓰다’는 말이 언제부턴가 생존을 위한 안간힘으로 변질됐음을 자각한다. 이건 정말이지, 무섭고도 지독한 일이라고 의식하면서. 그래서 더 애달픈 마음으로 이 짧은 소설들을 마주했다. 정녕 애쓰지 않아도 되는 걸까, 되뇌면서. 『애쓰지 않아도』에는 표제작을 비롯하여 열네 편의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작가 최은영의 시선이 머문 자리에서 맺어진 이야기들이기에 자연히 그녀가 바라본 세계를 응시하게 된다. 그곳에는 쉬이 상처받고, 오래도록 마음 안에서 무언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세계의 연약한 존재들..
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임솔아 외 | 문학동네 # 01. 「초파리 돌보기」, 임솔아 해피엔드 소설을 써달라는 원영의 말에 지유는 ‘소설은 소설일 뿐’(p.31)이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고심할 수밖에 없다. 다름에 아닌 엄마의 간곡한 부탁인 연유다. 자신을 잊고 살아온 그녀의 고단했던 삶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완성된 소설은 결과적으로 원영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초파리에게 로열젤리가 있었다면, 원영에게는 소중한 딸, 나아가 그녀가 선사해 준 해피엔드 소설이 있었으니까. 이원영은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하다. - p.38 # 02. 「저녁놀」, 김멜라 눈점과 먹점은 모모에게서 새로운 쓸모를 발견했다. 이로써 모모는 박스 안에서 벗어나 표표와 파파야와 함께 햇빛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지난날의 분노에 찬 성토는 힘을 잃었다. 자신들만의 ..
작별인사 | 김영하 | 복복서가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의 이분법을 허무는 김영하의 신비로운 지적 모험 “인간은 모든 것을 도구로만 여기고 그것의 활용을 고민한다. 나의 ‘용도’는 정확히 무엇일까?”(p.213) 골몰했던 철이의 고민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경계의 화두가 아닌가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 더욱이 인공지능이 일상 깊숙이 침투하면서 발생하게 될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하여 더 이상 대비하고 대처하기를 미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種) 이외의 다른 존재의 출현 - 그 안에서도 배제된 이들을 향한 우세한 이들의 무자비한 파괴와 폭력 - 을 한낱 상상 속의 장면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위기감 역시 느끼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선이가 말했던 ‘그냥 모여 있으면 힘이 되기도’(p.284) 한 우주정신을 발휘하는 ..
행성어 서점 | 김초엽 | 마음산책 탁월한 상상력, 온기 어린 시선 열네 편의 낯설고도 감각적인 이야기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이들을 그린 열네 편의 짧은 소설을 만나보았다. 그 안에서 나는, 나와는 확연히 다른 존재들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감싸 안을 수 있을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상상 너머의 낯선 세계에서 과연 나는 그들과 공존할 수 있을까. “나는 팔을 벌려 그 애를 안았어. 끝까지 안고 있었지. 비명을 참고 눈물을 참으며, 피부 표면을 칼로 베어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고통을 견디는 것이 사랑일까 생각하면서. (…) 그때 나는 불행히도 나에게 고통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어.” - p.30, 31 「선인장 끌어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