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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7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파트릭 모디아노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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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기억의 어두운 거리를 헤매는
한 남자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정

 

 

 

어쩌면 삶이란, 그런 것만 같다. …지워져 가는 것이고, 그로 인한 신비가 우리의 삶을 한결 아름답게 만든다고.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 p.262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나선 한 기억상실자의 이야기다. 기억을 찾기 위한 몇 가지 단서에 의존한 채 시작된 추적은 차츰 진전을 보이는 듯싶지만, 불확실성의 미궁에 빠진다.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그러모을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 실체가 흐릿해지며 존재 자체에 대한 의구심마저 품게 만드는 것이다. 여정의 막바지, 주인공(기 롤랑)은 해변에서 더 놀고 싶지만 엄마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의 슬픔처럼 쉬이 지워져 버리는 것을, '삶'에 비유한다. 안갯속으로 사리진 삶을 향한 끈질긴 추적 끝에 그가 움켜쥔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무것도 없다.

 

되돌아와 다시 첫 페이지를 펼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트와 헤어지는 순간부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 p.9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서 다시 읽는 첫 문장, 첫 문단은 굉장히 새롭게 읽힌다. 마치 보석을 보고도 보석인 줄 모르고 지나쳤던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아채고 돌아와 냉큼 주우며 그 사이 누가 집어가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마음이랄까. 곱씹을 수록 매혹적인 이 도입부는 마치 이 소설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면에서 함축적이고 집약적이다. '기 롤랑'이라는 인물이 홀로 이끌어가는 이 소설이 지닌 분위기,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찾아 헤매는 한 남자의 고독과 불안, 슬픔과 기대, 열정과 끈질김, 절망감과 피로, 자조와 체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단 몇 개의 짧은 문장을 통해 스며낸 것이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 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 p.130

 

 

 

이 소설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또 있다. '기억'이 가지는 인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그것이다. 이는 기억상실자의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않기에 더욱 매혹적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기억이라는 것의 속성은 시간의 소멸성과 함께 차츰 희미해져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기억이란 일생동안 필사로 붙잡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 간극에 선 인간의 모습을,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는 특유의 간결함과 차분함을 유지하며 서술하고 있어 한층 돋보인다.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 p.247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반양장) - 10점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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