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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무이해지는 동시에 비밀이 되는 것
시간이 자꾸 묻는다. 살아온 날들에 대해, 살아갈 날들에 대해. 나는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자못 진지하게 골몰한다. 대답해 보려고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배웠으므로. 그런데 늘어놓는 말들이 쌓인데 쌓이고 또 쌓여서 어느새 거대한 산이 됐다. 한낮인데도 한낮 같지 않은, 그 산중 어딘가에 내가 있다. 검은 입에서 나온 말들에 갇혀서 어느 날은 타는 목마름에 물을 찾아 헤매다가, 다른 날에는 가려움증에 온몸을 베베 꼬다가, 또 어느 날에는 죽은 듯이 잠자코 있다가, 또 다른 날에는 메스꺼움에 헛구역질을 해 대다가. 스미는 빛의 양이 줄어드는 정도만큼씩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은 사이좋게 깊어간다. 그렇게 한 시절을 보내고 껍질을 벗는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비로소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만큼의 유예 기간을 얻은 것에 불과하니. 여태껏의 장황한 과정들은 오직 그것을 위한 거대한 서사였으니.
긴 암전(暗轉)이 있었다 그때 나는 굽은 등 아래 동그랗게 어둠을 뭉쳐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상처의 마지막, 아직 덜 아문 갯벌 끝에 서서 나는 수평선까지 덮인 거대한 허물을 바라보았다 파도를 끌어당기며 저음에서 더욱 불거지던 노래의 근육, 오오, 추억이여, 네 한 팔의 금빛 소매를 이제, 내 한 팔로, 쭈욱, 걷어 올려주리라
- 「금빛 소매의 노래」 중에서
심보선 시인의 시적공간, 그 안에는 초연함이 자리한다. 슬픔이 있되 그것에 함부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거듭 '분열'하고 '명멸'하며, 알맞은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는 그것이 내 삶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부쩍 해오던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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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 ![]() 심보선 지음/문학과지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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