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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8

현남 오빠에게 | 조남주 외 |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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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스스로를 믿기로 선택한 여성의 삶을 정가운데 놓은 일곱 편의 이야기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테두리 아래 엮인 일곱 편을 만나보았다. 그중 몇몇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어찌나 숨 막힐 듯 답답하던지, 얼마쯤은 화도 났다. 소설 속 그녀들은 인생의 한 때를 자신을 지운 채 살아왔고, 어떤 이는 그런 삶에 길들여진 나머지 안타깝게도 더 이상의 개선 의지조차 없어 보이기도 했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는 말이 더 알맞아 보였다. 나는 그 지점에서 분노에 비례하는 슬픔을 느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아내이고 며느리이고 엄마라는 굴레에 갇힌 그녀에게 정녕 자유 의지란 없는 걸까.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과감히 목소리를 낼 순 없었던 걸까, 책망하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냥 한 사람만을 탓하기에는 애초부터 그녀가 놓인 자리부터가 불합리하지는 않았던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메우고 말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 우리가 페미니즘 소설에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인물과 설정들 대신 ― 독특한 상상과 기발함을 앞세운 몇몇 신선한 소설들 덕에 조금은 그 복잡함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일곱 가지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목소리로 집결된다. 그 한복판에서 많은 이들이 함께 답답해하고 분노하고 슬퍼했으면 좋겠다. 전면에 놓인 그녀들의 모습을 더이상 낯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문학에서도, 삶에서도, 그 한가운데 놓인 그녀들의 주도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다.

 

 

 

#01. 「현남 오빠에게」, 조남주

 

‘강현남, 이 개자식아!’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안도했다. 이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그녀의 앞날을 반겨 응원해 주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자연스레 강현남에게로 시선이 옮겨갔다. 나는 그가 뼛속까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역시 남성을 우위에 둔 사고가 당연하고 합당한 것임을 잘못 학습하며 길러진 또 하나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고 여긴다면 너무 비약일까. 어쨌든 그가 그녀를 상대로 다 널 위한 거라며 다그치며 행해온 잘못, 그 오만들에 대하여 훗날 적어도 뉘우칠 줄 아는 사람으로 이 사회 어딘가에서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청혼은 거절합니다. 저는 더 이상 ‘강현남의 여자’로 살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그럴듯한 프로포즈가 없어서 제가 망설이는 줄 알지만 아닙니다. 아니라는데 왜 자꾸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제 인생을 살고 싶고 너랑 결혼하기 싫은 겁니다.    - p.37, 38

 

 

 

#02. 「당신의 평화」, 최은영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도를 넘어서는 희생이라는 자각이 든다면, 일단 거기서 멈출 줄 알면 좋겠다. 그래서 고민하고 보다 주체적인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 내가 가장 안타까워했던 이는 정순이면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이 역시 정순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등 돌려 발을 떼던 딸 유진 역시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 복잡다단한 마음은 “너는 속이 깊은 아이야.”라는 엄마의 말이 더 이상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을 무렵을 기점으로 시작되었으리라. 정순은 하소연 끝에 ‘이런 삶’이라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얕잡아 규정하면서도, 또 다른 여성을 상대로 자신이 감당해온 삶의 무게를 지우려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비극이 몹시도 처연하게 다가왔다.

 

난 어째서 견뎠을까. 십년도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볼 때마다 유진은 자기 자신의 진심을 외면한 대가가 얼마나 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이 정도면 괜찮은 거지, 이 정도면 무난한 거지, 스스로를 속이고 속였던 시간들을, 다른 이가 겪는 부당함에는 화를 내고 저항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겼었던 부당함을 유진은 애써 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그 비겁을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녀는 인정할 수 있었다.    - p.67

 

 

 

#03. 「경년(更年)」, 김이설

 

아들이면 괜찮지만, 딸이면 안된다고 여기는 시선의 전형을 이들 가족과 주변 인물들에게서 마주하며, 진한 씁쓸함을 느낀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다소 과격한 세간의 말을 떠올릴 정도로 아버지라는 사람의 사고는 할 말을 잃게 한다. 그저 소설 속 인물로 갇혀 있기를 바랄 뿐. 대신 사춘기 아들과 딸을 둔 엄마의 목소리를,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태도 역시 성에 차지 않는다. 쪽지에 적힌 여자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보는 정도로는, - 아들 말고 딸까지 있어서 더욱 – 불편할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고해성사 정도 밖엔 뭐, 더가 있을까 싶은 뾰족한 마음이 들고 말았던 이유다. 그럼에도 남편의 동의가, 아들의 수긍이 없어도 자신만은 할 말을 할 참이라는 그녀의 속내를 믿어보고 싶다. 이 소설의 마침표 바깥에서라도.

 

풀어야 할 문제는 아들의 체면과 나의 심기가 아니었다. 나는 여자애들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쥐고 식탁 앞에 앉았다. 남편의 동의가 없어도, 아들아이가 수긍을 안 해도 나는 할말을 할 참이었다.    - p.118

 

 

 

#04. 「모든 것을 제자리에」, 최정화

 

작가노트에 적힌, ‘내가 나 자신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오염된 일부가 발견될 것 같았다.’는 한 줄의 문장이 가슴에 와 박힌다. 나는 이 세계에서 오염된 시선들과 사고들로부터 자유로울 이가 과연 존재하기는 할는지에 대하여 비겁한 마음으로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결벽적으로 자기 검열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습진 때문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에 물을 대고 말 것을 우려해 붕대를 동여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그녀는 결국 오염으로 얼룩진 환부를 주시했다. 거기에 어떤 끔찍한 것이 도사리고 있든 간에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는 여지도 생길 터다.

 

당시에 내 머릿속에 들어 있던 단 한 가지 생각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방을 다 치우고 난 뒤에 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하지만 가능한 한 그 집이 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물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 p.150

 

 

#05. 「이방인」, 손보미

 

“세상에, 이방인이 납시었구만.”이라고 내뱉었던 국장의 한마디가 메아리치듯 귓가를 맴돈다. 그들 눈에 비친 그녀는, 그들 세상의 이방인임에 분명하리라. 어쩌면 우리 조차 누아르 소설 혹은 영화의 남성 주인공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녀의 모습이 낯설었을 수도 있겠다. 여성이 주변 인물로서 섹스어필을 위한 한 방편으로 소비되고 마는 경우를 얼마나 흔하게 마주 했던가를 떠올려보면, 그리 무리한 일도 아니다. 어찌 됐든 우선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이방인이든 아니든 그들이 장악한 세계 안에서 밀려나지 않고 발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무려 그 한가운데서 말이다. 나는 작가노트에 적힌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 마음에 든다.

 

난 그저 추락하고 싶은 거야. 난 죽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다시 살아가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거야. 내가 나를 배신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    - p182, 183

 

 

 

#06.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구병모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성의 정형화된 형상이, 아름다운 여신이거나 흉측하고 기괴한 괴물이라는 데서 출발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 안에서도 후자에 속하는 ‘하르피아이’라는 괴물의 폭력성을 우연하게 여장대회에 참가한 ‘표’라는 인물과 접목함으로써 여태껏 감당해왔던 여성의 수난 역사를 역지사지로 바라보게 만드는데, 그 방향성이 흥미롭다. 축제의 밤은 표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느닷없는 봉변에 가까운 기괴한 경험이었겠지만, 마찬가지로 그 반대편 역시 다르지 않음을 새삼 상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런 상호 파괴적인 게임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누구든, 이걸 발견한다면 가져가서 드세요. 그리고 부디 온 힘을 다해 도망차시기를.    - p.237

 

 

 

#07. 「화성의 아이」, 김성중

 

화성으로 보내지 실험동물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는 그곳에서 비슷한 처지의 죽은 개 라이카와 버려젠 탐사로봇 데이모스를 만난다. 그리고 그들은 서서히 가까워지며 친구가 된다. 그 안에서 주목할 점이라면, 그들이 속해있는 '화성'이라는 공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매우 낯선 공간이지만 동시에 기존의 것들로부터 놓여 난, 그래서 그들 나름의 생활을 새로이 펼쳐나갈 수 있는 터전이기도 한 이유다. 마침 '나'는 임신 중이었고, 새 생명의 탄생은 그녀들의 앞날에도 좋은 기운을 보태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든다. 그 상쾌한 화성의 바람이 이곳까지도 불어온다면!

 

“나는 온 우주에서 오직 너만을 걱정한단다. 얘야. 모든 별들은 어머니이고 우리는 춥지 않단다.    - p.271

 

 

 

 

 

현남 오빠에게 (어나더커버 특별판) - 8점
조남주 외 지음/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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