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별별책/2021

일인칭 단수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반응형

 

[이미지 출처 - 알라딘]

 

 

 

가장 개인적인, 가장 보편적인 기억과 기록의 주인공
'나'라는 소우주를 탐색하는 여덟 갈래의 이야기

 

 

 


“기억이란 때때로 내게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 중 하나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 p.79 「위드 더 비틀스(With the Beatles)」 중에서

 

 

‘나’는 자신만의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날의 일을 돌이켜 보는 순간, 당시와는 조금 다른 결로 그때의 기억이 다가옴을 느낀다. 그것은 변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월의 흐름 속에서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고 그 안에서 차츰 다듬어진 내면의 변화에서 그 연유를 찾아야 하리라. 그렇기에 그 흐름에 위화감이 드는 일은 없고, 외려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만 하다. 도무지 불가해했던 일마저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수긍이 갈 만큼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틈이 생긴 까닭일는지. 그리하여 소설 속 ‘나’의 기억은 보편성을 획득함으로써 어느새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 01. 「돌베개에」


누군들 알 수 있을까. 그저 미미하게 남은 기억, 그러니까 그때의 어렴풋한 분위기와 기분 따위, ‘약간의 말(語)이 우리 곁엔 남’(p.24)아 있을 뿐. 그러나 일단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남아서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 생명력은 의외로 질긴 듯하다. 다른 모든 것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가운데 그것만은 긴 세월에도 잊히지 않을 만큼. 나 역시 지난날의 무언가를 한 번씩 꺼내어 보곤 하는데, 새삼 그 행위가 가지는 의미나 가치에 대하여 떠올려 보게 된다. 역시나 잘 모르겠다. 그저 모든 것이 사라졌고 그 무언가 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 외에는.

 

솔직히 말해, 정말로 잘 모르겠다.    - p.25

 

 

 

# 02. 「크림」

 

초대에 응했다가 허탕 친 ‘나’는 백발의 노인과 마주한다. 그는 ‘크림’에 대하여 말하면서, ‘나머지는 죄다 하찮고 시시할 뿐’(p.45)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이따금 불가사의한 상황으로 인해 당황하고 심지어 상처받기까지 하는 일에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훗날 돌이켜봤을 때 여전히 알 수 없는 기묘한 일이었다고 여기면서, 신기하게도 그때의 폭풍같이 휘몰아치던 감정들이 고요 해져 있음을 문득 깨우칠 때가 있다. 흔히 말하듯 시간이 약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그것이 ‘하찮고 시시한 것’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인생의 크림에만 집중할 것!

 

자네 머리는 말일세, 어려운 걸 생각하라고 있는 거야. 모르는 걸 어떻게든 알아내라고 있는 거라고.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나머지는 죄다 하찮고 시시할 뿐이지.    - p.50

 

 

 

# 03.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기묘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어쩌다 일어난다. 설사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고 해도 쉬이 믿어주지 않을 법한 일들, 어쩌면 자신조차도 재차 사실 관계를 확인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 말이다. ‘나’에게는 알토색소폰의 대부 찰리 파커가 그렇다. 대학 시절 쓴 가상의 비평을 계기로 십수 년이 지나서까지 이어지는 신기한 인연이란……, 혹여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니었을까, 의심 케도 하는 바로 그 일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맺는다. ‘당신은 이 이야기가 믿어지는가? 믿는 게 좋다. 어쨌거나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까.’(p,71)

 

“어쨌거나 난 자네에게 고맙다고 해야 돼. (…) 자네는 나에게 다시 한번 생명을 줬어. 그리고 내가 보사노바 음악을 연주하게 해줬지. 내게는 무엇보다 기쁜 경험이었어.”    - p.69

 

 

 

# 04.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

비틀스 열풍이 세계를 강타하던 시대, 자신을 스쳐 지나간 아름다운 소녀를 이따금 떠올린다. 이후 사귀게 된 – 비틀스 음악에 거의 흥미가 없던 - 첫 여자 친구 역시 마찬가지인데, 특히 그녀의 오빠와 우연하게 마주했던 어느 일요일 오전의 단 한 번이 그렇다. 그로부터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다시 한번 그와의 조우는 어쩐지 그 만남에 대단한 의미라도 지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될 만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저 그렇게 흘러가서 발생된 우연일 따름이고, ‘나’에게는 새로운 기억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문득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기억들을 그러모으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 중 하나’이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이기에.

 

우리는 우연의 이끌림에 따라 두 번 마주했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사이에 두고 600킬로미터쯤 떨어진 두 도시에서. 그리고 테이블에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고,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범한 담소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 우리가 살아간다는 행위에 포함된 의미 비슷한 것을 – 시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우연에 의해 어쩌다 실현된 단순한 시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 두 사람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요소는 없었다.    - p.120

 

 

 

# 05.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그다지 이름난 선수도 없고, 홈경기에 원정 팬의 수가 더 많이 찾아오는 야구 구단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오랜 팬인 ‘나’. 심지어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까지 자비 출판했단다. 요즘 말로 찐 팬이라고 밖에. 응원 팀의 셀 수 없는 ‘지는 경기’ 속에서 ‘뭐, 인생에는 지는 훈련도 중요하니까’(p.130)를 읊조렸다고도 고백한다. 그러나 회심의 반전이 있다. 그가 『군조』신인문학상을 타며 소설가로 데뷔하던 그 해(1978년), 그의 응원 구단 역시 첫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더욱이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시집은 이제 귀하신 몸이 되었고. 이길 적보다 지는 때가 더 많기 마련인 우리네 인생 길이 그래서 걸어볼 만한 건 아닐는지,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어쩌다 그런 팀의 팬이 되었을까? (…) 어쩌면 나라는 인간의 간결한 전기 비슷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 p.127

 

 

 

# 06. 「사육제(Carnaval)」

상대가 어떤 외모를 지녔건 간에 대화를 통해, 그것도 공통된 관심사에 대하여 이야기 나눔으로써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 ‘나’의 경우가 그러한데, 그 인연은 남녀의 이성적 관계가 아닌 철저하게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 – 특히 슈만의 <사육제> - 을 감상하며 의견 교환하는 데에 한정한다. 그러던 중 돌연 연락이 끊기고 이후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그녀를 발견함으로써 이전 기억을 되짚어본다. 특히나 우리가 필연적으로 쓰기 마련인 가면의 양면성을 말하던 그녀에 대하여. 과연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음악과 관련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상대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해악을 끼친 가해자일 수 있다는 그 엄청난 간극이 일전에 그녀가 말했던 ‘우리’이기 전에 ‘그녀 자신’이었음을 앞서 고백하기라도 했던 걸까. 카니발에 빗대어 말이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 – 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 p.169

 

 

 

# 07.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하룻밤 묵게 된 낡은 료칸에서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원숭이를 만난다. 심지어 원숭이와 맥주를 사이에 두고 ‘사랑’을 논했다면?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꿈이라도 꾼 것이 아니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되물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나’ 역시도 이름을 잊은 여인에게 설명하기를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상에는 도무지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도처에 있다. 더욱이 원숭이는 대학교수 부부의 시나가와 주택에서 - 그것도 브루쿠너의 7번을 좋아하고 3악장을 들으면 용기가 나곤 했던 나날을 – 지내 온 이력이 있다지 않은가. 어찌 됐든 그 진위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연모의 타깃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

 

제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아가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연료입니다. 그 사랑은 언젠가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이 됩니다.    - p.202, 203

 

 

 

# 08. 「일인칭 단수」

평소와 다른 헤어스타일이나 메이크업, 옷차림의 변화는 거울 앞의 자신을 낯설게 만든다. 동시에 낯선 자신을 통해 스스로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픈 욕망을 일게도 한다. 말하자면, 입때껏 자신이 걸어온 길이 아닌,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이랄까. ‘나’는 옷장을 살피다가 일년에 두세 번 입는 것이 고작인 양복을 입어보고는 그 길로 지금껏 가본 일 없는 바로 향한다. 그러나 당도한 곳에서 한 여자가 걸어온 시비에 당혹스러워하며 곧 자리를 일어서는데, 문득 그에게 그날의 일이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해진다. 일인칭 단수로서 실재하는 자신의 일이 아닌 누군가의 일로 치부해도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서. 말끔하게 양복을 잘 차려입은 자신은 그저 잠시 거울에 비친 누군가였기에 말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 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 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 p.223, 224

 

 

 

 

 

일인칭 단수 - 8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문학동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