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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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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혼자에게 | 이병률 | 달 “왜 혼자냐고요. 괜찮아서요.” 이 세계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일, 나는 그 비결을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 적어도 시작은 거기에서부터 라야 한다고 – 믿고 있다.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의 가치를 신뢰하는 연유다. 그것은 곧 살아갈 날들의 지평을 견고하게 다져가는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므로. 그러므로 거친 비바람에도 쉬이 뽑히지 않는 뿌리를 내리는 동시에 무성한 잎을 피우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할 이 시간들을 늘 고대하고 있다. 사실 나는 혼자이기보다는 둘이거나 셋, 그 이상이기를 바랐다. 혼자 있는 것에 도무지 익숙지 못한 데다가, 어떤 때에는 두렵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그랬던 내가 철저하게 혼자이기를 갈망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에 내가 느꼈던 스스로에 대한 낯..
女湯のできごと(여탕에서 생긴 일) | 益田ミリ | 光文社 “남자들이 없는 그곳에서 여자들은 뭘 할까?” 유년시절, 매일같이 드나들던 동네 목욕탕에서의 추억을 담고 있다. 아무렇지 않던 남탕 출입이 어느 순간 부끄럽게 느껴지면서 자신이 여자라는 생물이란 걸 자각하게 됐다는 작가의 본격 여탕 출입기인 셈이다. 사춘기 무렵 찾아온 신체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며 고민에 빠졌던 나날, 목욕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에 엄마, 여동생과 나눠 마시던 음료수에 대한 추억을 꺼내어 본다. 뭐든 아까워하는 아줌마들의 등쌀에 헬멧같이 생긴 헤어 드라이기 아래 종종 앉혀지기도, 어릴 적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푸석하고 늘어진 피부의 할머니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미래 모습을 상상하는 한편,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주 목욕탕에 드나들지는 않지만 그때보다 한결 자유롭고 편해진 스스로를 발..
북유럽 신화 | 닐 게이먼 | 나무의철학 최고의 이야기꾼 닐 게이먼이 완성한 이 시대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북유럽 신화 신화를 떠올리자면 우리 민족의 시조이자 이 땅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단군의 신화가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이와 함께 그리스∙로마 신화 역시 빠뜨릴 수 없는데, 제우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과의 만남은 새롭고도 우아했고 불가사의한 신비로움에 매혹되기도, 때로는 그 잔혹함에 두 눈을 질끈 감기도 했었다. 어찌 됐든 한동안의 나는 그 미지의 세계를 정처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부유해야 할 만큼 매료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북유럽 신화는 어떨까. 닐 게이먼은 작가의 말을 통해 “북유럽 신화는 길고 긴 겨울밤과 끝없이 계속되는 여름날이 존재하는 추운 지역의 신화, 자신의 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고 마냥 ..
숨 | 테드 창 | 엘리 낯선 테크놀로지가 넘쳐나는 새로운 세상을 앞둔 우리에게 독보적 상상력과 예언적 통찰로 무장한 소설가가 던지는 질문 "그리하여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이 가지는 절대적 영향력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응시하게 한다. 인류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까닭이다. 표제작 「숨」을 비롯한 아홉 편의 이야기가 우리 가슴에 자못 서늘하게 다가온다면, 결국 우리 스스로가 그 길 위에서 일말의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우주 안의 모든 생명들이 가지는 경이로움을 되새기는 한편 인간 외 종과 상호작용하며 공생할 수 있는 문명의 길을 찾아 나서야 마땅하리라. 더불어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미래 사회로의 길 도처에서 마주할 유혹과 자만,..
그런 책은 없는데요… | 젠 캠벨 | 현암사 엉뚱한 손님들과 오늘도 평화로운 작은 책방 서점을 배경으로 직원과 손님 사이에 일어난 일화들을 엮은 책이다. 더욱이 이 이야기들이 저자가 영국 런던의 책방에서 일하면서 겪은 실화이기에 한층 흥미롭게 다가온다. 사실 우리가 책을 사고파는 공간 안에서 직원과 손님 사이에 오갈 법한 대화를 상상하자면, 단연 특정 책을 찾는 손님과 그것의 재고 유무를 파악해 손님에게 건네는 직원 간의 대화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책을 찾는 모든 손님들이 자신이 원하는 책의 정보를 완벽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책 제목은 물론 작가명 마저 모르기 일쑤다. 과연 책 표지가 녹색이었고 내용은 무척 웃겼다는 단서만으로 손님이 원하는 책을 찾아줄 직원이 존재하기는 할는지. 만약 내가 직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무리 생각..
오직 한 사람의 차지 | 김금희 | 문학동네 우리가 살아낸 모든 시간을 긍정하는 다정한 문장들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뿐이라는 생각을 한다.”(p.293)는 작가의 말이 묵직하게 와닿는다. 소설집 『오직 한 사람의 차지』에 엮인 아홉 편은 결국 이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놓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저마다의 분투, 그 과정 안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살면서 마주하는 어떤 감정들은 때때로 우리의 지난날을 곱씹게 한다. 대개는 소외돼 쓸쓸하고 못 견디게 지독하면서도 성가신, 그로 인해 얼마간은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기 마저 한 아프고 쓰린 기억들이다. 나는 그런 지리멸렬한 삶의 속성이 지니는 환멸을 뒤로하고서도 나아갈 수 있는 억척스러움이 자기 안에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살아간다’는 일의 ..
리케 | 마이크 비킹 | 흐름출판 20개국 출간, 마이크 비킹이 전 세계에서 찾은 행복의 조각 공동체, 자유, 신뢰, 친절…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는 여정! 덴마크 코펜하겐 행복연구소의 소장으로 행복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는 마이크 비킹은 《휘게 라이프》를 통해 앞서 만난 적 있다. 그때만 해도 생소했던 ‘휘게(hygge)’는 일상 안에서 만끽할 수 있는 소소한 행복, 그 감정 자체에 초점을 둔 개념으로 마음을 밝히는 작은 양초에 비유한다면, 이번 책에서 다루고 있는 ‘리케(lykke)’는 밝힌 양초를 꺼뜨리지 않고 되도록 오래 지속하고자 하는데 중점을 둔다. 그러니까 휘게가 정서적 영역에서의 순간적 행복이라면, 리케는 보다 확장된 인지적 영역에서의 총체적 행복으로 인생 전반에 걸쳐 느끼는 행복감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책을 ..
주주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맛있는 햄버그 속에는 누구도 만질 수 없는 기적의 공간이 있다." 오랜만에 읽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언제나처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하게 한다. 이야기에 깃든 치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햄버그 스테이크 가게 ‘주주’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도우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시간들 속 노력은 착실하게 쌓여 지난날의 상처를 조금씩 아물게 하고 새 살도 오르게 한다. 흔히 이 일련의 과정을 두고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라는 문장 안에서 이해하곤 하는데, 어쩌면 그것은 삶의 민낯을 확인하는 일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온전하게 감당해야 할 시련의 몫이 늘 우리 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