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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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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고양이의 비밀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수수께끼 가득한 세상에서 마이 페이스 소설가로 살아가기 짬짬이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언제나 환영이다. 더욱이 하루키가 쓴 글이라면, 여기에 미즈마루의 그림이 보태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에세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은 1995년에서 1996년까지 「주간 아사히」에 연재된 에세이 60여 편을 모은 것이라 했다. 스무 해가 훌쩍 지난 뒤에서야 만난 글과 그림임에도 위화감 없이 술술, 그야말로 짬짬이 유쾌하게 읽었다. 우선 책 제목이기도 해서 눈길을 끌었던 장수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애묘가로 익히 알려진 그에게 지금껏 인연을 맺은 고양이들이 제법 있으리라 짐작하지만 연재 당시 살아있던, 그러나 연재 마무리와 함께 세상을 떠난 고양이 뮤즈에 대해 적고 있다. 유일하게 이십 년 넘게 산 고양이였고,..
연필로 쓰기 | 김훈 | 문학동네 연필은 나의 삽이다 지우개는 나의 망설임이다 세월의 풍파를 거쳐온 노작가의 사람과 사회를 향한 지극한 관심이 『연필로 쓰기』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선보였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산문들을 만나며, 연륜에서 나오는 혜안과 통찰력에 한 번, 문장과 문장 사이에 깃든 화해와 포용의 씀씀이에 두 번 감탄했다. 그야말로, 삶을 향한 애정 없이는 쓰일 수 없는 글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작가는 앞서 알림을 통해 밝힌 ‘나는 삶을 구성하는 여러 파편들, 스쳐 지나가는 것들,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을 구태여 골몰하고 정리하여 원고를 써내는 행위가 얼마나 고된 일일지 감히 헤..
안녕, 나의 등대 | 소피 블랙올 | 비룡소 거대한 바다 위,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등대지기 가족의 이야기 등대처럼 빛나는 잔잔하고 깊은 울림! 등대를 향해 안부를 묻는다. 그것은 곧 나와 당신, 우리 모두의 삶을 향한 안부이기도 하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등대를 바라볼 적이면, 한없이 외로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없이 든든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이따금 내가 만약 등대지기라면……, 상상해 보곤 했다. 『안녕, 나의 등대』는 여태껏 내가 등대를 바라보면서 품었던 이런저런 단상들 - 그 상념들의 팔 할은 이제는 무용해진 것들, 그리고 사라져 버린 것들 - 을 매우 번듯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놓은 듯하다. 그것도 아주 기분 좋은 온기를 품고서.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한결 같은 모습으로 불을 밝히고 있는 등대와..
진이, 지니 | 정유정 | 은행나무 생의 가장 치열했던 사흘 눈부시게 다시 시작되는 삶의 이야기 진이의 마지막 출근과 그로부터의 3일간의 시간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불현듯 닥쳐온 불운한 사고가 그녀의 삶을 막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 안에서 그녀가 온몸으로 보여준 삶을 향한 태도는 단연 눈부시다. 그 진면목은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에 앞서 지니의 앞날을 진심으로 염려하며 남긴 당부를 통해 드러난다. 자신을 도왔던 김민주에게 남긴 편지 역시 빠뜨릴 수 없다.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쓴 추신 - 나와 지니는 오래오래 너를 기억할 거야. 네 형편없는 노래도. (p.361) – 의 두 줄 문장은 모르긴 몰라도 김민주의 마음속에서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왐바로 떠난 지니 역시도 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 어크로스 인생과 허무와 아름다움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나는 누구인가’를 이따금 생각한다. 이 물음은 아주 잠깐 때로는 한동안의 나를 사로잡을 만큼 골몰하게도 하는데, 대개는 새삼스럽게 존재를 고민하는 철학 책에 기웃거리는 행위로 나타나곤 했다. 가장 극에 달했을 때는 켄 윌버의 『무경계』를 쥐고 혼자서 심각하게 씨름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 그것 자체가 아예 소용없는 일이라고 까지는 여기진 않지만, ― 그 분투가 무색하게 내가 손에 넣은 것은 손아귀에 쥔 모래알과도 같았다. 쥔 만큼이라도 어떻게든 붙들고 싶었지만, 결국 손가락 사이로 속절없이 빠져나가고 마는. 그러니까 애초부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은 그렇게 얻을 답이 아니었다. 어쨌든 마음 깊숙이에서 나란 존재의 정체를 밝혀보려는 시도..
잘 다녀와 | 톤 텔레헨 | arte "세상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어. 떠나보면 달라질까?" 사람들은 저 너머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곤 한다. 그러나 그런 호기심만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역시 갖고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외에도 각자가 놓인 개별적 상황과 여건이라는 변수가 분명하게 존재하기는 할 테다. 그러나 결국은 이 두 가지의 시소게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호기심이 조금 더 우세하다면 떠날 것이고, 두려움이 조금 더 크다면 그 자리에 머물 것이라는. 톤 텔레헨의 소설 『잘 다녀와』는 숲속의 여러 동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 망설임과 두려움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는 떠날 채비를 마치고서도 계속 망설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결심 끝에 떠난 곳에..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 마음산책 누군가 오래 본 문장, 누군가 오래 볼 문장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렇게, 그냥 그 정도로만. 그럼, 다들 잘 지내시기를.’(p.239)이라 맺고 있는 문장의 구두점을, 나는 한참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청춘(靑春)에 고하는 이별사(離別辭)와도 같이 들렸으므로. 나의 청춘도, 당신의 청춘도 잘 지내시라는 짤막한 당부의 말이 담백하고도 담담했지만, 그 바람의 마음은 어쩐지 불어오는 바람처럼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래서 오로지 피부결에 와닿아야지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어서 한층 적막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집 막내였던 녀석과 함께 했던 산책길을 혼자 거닐다가 그 언저리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문득 그 녀석..
夜空の下で(밤하늘 아래) | 益田ミリ | 集英社 마스다 미리가 그리는 작디작은 우리와 거대한 우주의 이야기 깊고 넓은 밤하늘 아래 당신과 나, 우리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무수한 밤 올려다보았던 하늘, 그 안에서 늘 별을 좇고 있었다. 마치 가까운 친구라도 되는 양 어떤 날에는 저 별들이 있어서 덜 외롭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다른 어떤 날에는 꺼져 가는 듯 희미하게 빛나는 별을 보면서 멋대로 힘내라고 응원하기도 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 어떤 날에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같은 별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를 누군가를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늘 감상적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이따금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의문을 품곤 했는데, 그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친근했던 대상을 한순간에 한없이 낯선 대상으로 돌아서게도 했던 것이다. 그런 날의 나는 지구에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