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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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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 에밀리 디킨슨 | 을유문화사 내면으로 침잠하여 지상의 환희로 나아간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대표 시 선집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손꼽히는 에밀리 디킨슨. 그녀는 독신의 삶을 살며 제한된 공간 속에서 내면의 사색을 추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시는 그런 그녀의 삶을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대변하고 있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데, 이를 테면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제도권 안에서 순응하고 안주하는 대신 마주한 모든 것들에 대한 내면화를 시도함으로써 주체적으로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해하고자 했음을 여실하게 보이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그 안에서 자연스레 시에서 무수히 등장하고 있는 대시(dash)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품었던 생각들 — 기쁨과 즐거움, 괴로움과 고통, 억압과 구속, 의문과 확신, 감동과 여운… — 은 ..
사라진 것들 |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불안하지만 빛나던 시절 청춘, 예술 그리고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들 문득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p.21)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말하자면 상실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제 안의 의지의 산물이기도 했고 그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기도 했다. 또한 일순 벌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일어났음을 후일 자각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사라진 것들을 곱씹으며 나름의 방식으로 상실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때때로 깊은 슬픔과 고통을 수반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은 — 일말의 후회와 자책, 아쉬움을 담고 있기는 했으나 —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희석됐다. 다만 그 가운데서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 애써 지난날의 무언가를 돌이켜 보려..
에이미와 이저벨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택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어려움에 관해 빛나는 고결함과 유머로 써내려간 소설 딸 에이미와 엄마 이저벨은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 관계에는 미묘한 어긋남이 자리한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친밀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도무지 가 닿을 수 없는 간극이 모녀가 보낸 무더운 계절 안에서 한층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질식할 듯 뿜어내는, 그럼에도 이미 익숙해져 버린 유황 냄새에 장악당한 그녀들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만큼이나 끈질기고도 지독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바보 같은 자신들의 삶이 고단하고 구역질났지만 서로 찰싹 들러붙어 있”(p.313)을 수밖에 없다고 한 이 관계에 대하여 자연스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비단 모녀 관계의 일만은 아니..
로마 이야기 | 줌파 라히리 | 마음산책 "몇 번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단테 알리기에리」의 ‘나’는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광장 위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에 친구 중 하나가 로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참 엿 같은 도시야.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p.279)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쓴 두 번째 소설 『로마 이야기』를 관통하는 문장이자, 그녀의 진심이 물씬 담긴 표현이라 여기며 이 책을 덮었던 것부터 적어둬야겠다. 정말 아름답지만 그에 상응하는 증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애증이야말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솔직한 감정 중의 하나일 것이므로 한층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를 떠올리면, 인도계 이민 2세대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했고 이후 이탈리아 로마로 이..
내 이름은 루시 바턴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 모든 생(生)은 감동이다! 소설가가 된 ‘나’(루시 바턴)는 자신이 걸어온 삶을 돌이켜본다. 그 시작은 1980년대 중반, 9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욕에서 가정을 꾸린 때였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남편을 대신해 상당 기간 연락을 하고 있지 않던 엄마의 병간호를 받아야 했던 상황이었다. 자연히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 안에서 그 시절 가족들과 앰개시라는 작은 시골 마을 그리고 이웃들… 소소한 행복이 있기도 했지만 지독히 벗어나고 싶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알알이 살아난다. “지금은 내 인생도 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여기면서도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
여우 8 | 조지 손더스 | 문학동네 사라져가는 숲과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말을 배운 여우가 전하는 위트 있는 경고! “좀 차캐지려고 노력카새요.”라는 여우 8의 충고에 잠시 멈칫했다. 좀 착해지라니…… 그렇다. 당혹스럽지만, 확실히 우리는 좀 착해질 필요가 있지 않은가. 얼마 전 한 tv 랭킹 쇼에서 인간이 배출하는 음식물 탓에 일 년 내내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된 야생 흑곰들이 겨울잠을 자지 않게 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에 기후 변화가 더해져 한겨울에도 체온 유지가 용이하게 돼 곰들의 동면 거부를 부추기고 있다고도 했다. 이에 마을로 내려온 곰들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 사람들이 늘어나자 미국 캘리포니아 당국에서는 이들의 안락사를 고려하고 있는 실정이라고도 덧붙였다. 원인 제공자는 명백히 인간임에도 곰에게 책임 전가를 하고 있..
워터멜론 슈가에서 | 리처드 브라우티건 | 비채 일곱 가지 태양이 뜨는 마을에서 펼쳐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마을의 모든 것은 워터멜론 슈가에서 시작된다. 태양 아래 날마다 서로 다른 일곱 가지 빛을 발하며 반짝이는 워터멜론 즙을 짜내 불에 졸여 얻어 낸 슈가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편히 쉴 수 있는 오두막,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들판… 까지도.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이 모든 행위는 단순한 노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착실하게 삶을 일궈나간다는. 그들이 살고 있는 워터멜론 슈가로 둘러싸인 마을, 아이디아뜨(iDEATH)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다. 지극히 유토피아적이면서도 자연친화적 면모가 도드라진다. 그러나 더없이 이상적이고도 평화로운 배경이 무색하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사랑을 하고 배신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현대 미국 단편 문학의 가장 빛나는 성취 인간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납득하고 이해하기를 바란다. 이 순간, 이 사람, 이 관계,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을 납득하고 이해하기를, 때로는 이해받기를 바라 마지않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인간의 기본값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는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더러는 자기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인간은 매 순간 이해하기를 멈추지 않는데, 그 불가능함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시도해 나가는 과정 안에서 삶은 안정적으로 진행 중이라는 것이 유독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마치 삶이 불가해한 것인 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라도 한 것처럼.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실린 열 편, 그 안에 등장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