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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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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메이 아줌마 | 신시아 라일런트 | 사계절 "눈부시게 하얀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낡은 트레일러에서 나는 마침내 집을 찾았다." “메이 아줌마의 영혼인, 눈부시게 새하얀 바람개비 ‘메이’”(p.118)가 바람결에 돌아가는 걸 바라보면서 서머와 오브 아저씨는 무얼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는 기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바람개비처럼 메이 아줌마 역시도 훨훨 자유로이 날아가시기를. 이제 자신과 오브 아저씨도 그간의 슬픔은 묻어두고 대신 아줌마와 함께해서 좋았던 기억, 사랑만을 마음에 담아 꿋꿋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도 했으리라. 그리하여 오늘까지 흘린 눈물방울들은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반짝이는 결정이 되어 산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이 자리하게 될 것이라고도 나는 믿기로 했다. 이야기의 마지막, 클리터스는 축복을 내린다. “영혼의 소리가 담고 있는 ..
이선 프롬 | 이디스 워튼 | 민음사 애정 없는 결혼 속에서 ‘낡은 폐선’처럼 살아가는 이선 프롬 도덕과 윤리의 이름으로 억압해 버린, 우리 내면의 슬픈 자화상 소설 속 ‘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통해 그 자신이 여러 사람들에게서 전해 듣고,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기도 한 이선 프롬과 두 여인(지나, 매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난 더 큰 액자 밖에서 이선 프롬이라는 인물의 감정선에 자연스레 몰입하게 된다. 이는 곧 마음속에 드리운 그림자를 가만히 응시하는 일이기도 할진대, 이를테면 삶 속에서 – 그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 억압되기 마련인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과도 같으리라.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타당한 일이지만, 그것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희..
여름 | 이디스 워튼 | 민음사 미국 문단에서 여성의 성적 열정을 다룬 최초의 본격 문학 열여덟 살의 소녀 채리티가 어엿한 여성으로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디스 워튼의 소설, 『여름』.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싱그러운 여름날 채리티 앞에 나타난 건축가 하니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숭고한 계절의 흐름은 때가 되면 여름을 보내줘야 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마찬가지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결단한다. 자신을 산에서 데려온 후견인 로열과 미래를 함께하기로. 앞서 말했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만남과 사랑, 헤어짐의 과정 안에서 드러나는 채리티의 심리적 성장에 있다. “모든 게 지긋지긋해!”(p.8)라며 불만하는 것으로 등장하던 소녀가 다른 여인과 약혼한 연인에게 오랜 고심 끝에 보낸 몇 줄 편지에는 그로..
내 휴식과 이완의 해 | 오테사 모시페그 | 문학동네 일 년간 잠을 자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삶에 휴식과 이완을 부여하기 위해 일 년간 잠을 자기로 결심한 주인공을 처음 만났을 때, 문득 최승자 시인의 오래된 시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까무러쳤다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라 절규하던 마지막 행이 그것이었다. 차마 죽기는 뭣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일정 기간 동안 지금의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상황을 진정시키고 싶은 욕망. 그것은 차라리 삶에 대한 애착에 기반한 비명이고 몸부림이었다고 나는 이해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일 년간 잠을 자는 계획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를 – 낯선 작가의 소설 안에서 - 조우했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 현재의 고통을 딛고 일어나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바람으로 이 ..
축복받은 집 | 줌파 라히리 | 마음산책 줌파 라히리의 첫 소설집 퓰리처상, 펜/헤밍웨이상 수상작 인간 존재와 그 내면, 나아가 그들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돋보인다. 이를테면 어떤 상황 하에 직면해 있는 등장인물들은 그들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는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분노하고 실망하며 당혹스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보람과 기쁨, 안도감을 맛보기도 한다. 또한 타인의 새로운 시선을 통해 익숙했으나 낯설어진 세계에 맞닥뜨림으로써 자신은 물론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하루를, 일 년을,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의 이야기 끝에서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새로이 시작된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각기 사정과 처해 있는 상황이 다름에도, 우리..
우먼 인 윈도 | A.J. 핀 | 비채 “내가 본 것은 정말로 살인사건이었을까?” 애나는 광장공포증으로 인해 향정신성 약물과 술에 의지한 채 집 안에서만 생활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러셀 가족의 집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되면서 위태로웠던 그녀의 삶은 한층 위기에 빠진다. 자신은 분명하게 목격한 것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애초에 발생한 적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는 까닭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극도의 혼란과 불안에 빠진 한 인간의 모습은 저자의 치밀한 심리 묘사 안에서 보다 현실감 있게 구현되고 있다. 더욱이 모든 내막이 서서히 밝혀지기까지 스릴러라는 장르에서 흔히 기대하기 마련인 적당한 긴장감은 육백 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오랜만에 읽은 스릴러 소설 『우먼 인 윈도』. 읽는 순간만..
숨 | 테드 창 | 엘리 낯선 테크놀로지가 넘쳐나는 새로운 세상을 앞둔 우리에게 독보적 상상력과 예언적 통찰로 무장한 소설가가 던지는 질문 "그리하여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이 가지는 절대적 영향력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응시하게 한다. 인류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까닭이다. 표제작 「숨」을 비롯한 아홉 편의 이야기가 우리 가슴에 자못 서늘하게 다가온다면, 결국 우리 스스로가 그 길 위에서 일말의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우주 안의 모든 생명들이 가지는 경이로움을 되새기는 한편 인간 외 종과 상호작용하며 공생할 수 있는 문명의 길을 찾아 나서야 마땅하리라. 더불어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미래 사회로의 길 도처에서 마주할 유혹과 자만,..
내가 있는 곳 | 줌파 라히리 | 마음산책 대부분 외롭지만, 가끔은 온기를 느끼고 가끔은 온전히 나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순간의 기억들 어떤 장소에서 마주한 상황,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과 그것의 미묘한 변화가 짤막한 이야기 안에 응축돼 있다. 다소 쓸쓸해 보이지만 그 고독을 쉬이 포기할 수 없어 보이는 ‘그녀’가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다. 그녀의 발길이 닿는 곳을 따라 장소는 계속 바뀐다. 그리고 그 공간들은 그녀가 일상을 영위하는데 스치고 잠시 머무는, 때로는 한동안 머물기도 하는 평범하고도 친근한 장소들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집과 집 근처 보도, 공원, 다리, 광장이 배경이 된다. 서점과 박물관, 수영장과 뷰티숍, 슈퍼마켓, 카페, 역 등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짤막한 이야기 속 배경은 흐려 보인다. 그저 그 장소에 놓인 그녀와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