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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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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 황금가지 전 세계 미스터리의 역사를 재창조한 추리 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를 대표하는 작품만을 모은 에디터스 초이스 열 명의 사람들이 오웬 부부 소유의 병정 섬에 초대된다.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각기 다른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저마다 누군가의 죽음에 연루됐음에도 법으로는 심판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저택에 들어선 사람들은 곧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되고, 액자 속 병정에 관한 오래된 자장가 가사에 맞춰 한 명씩 죽임 당하게 된다. 식탁에 놓여 있던 열 꼬마 병정 인형의 수 역시 차례로 하나씩 사라져 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1939년작 임에도 근래 발표된 여느 추리소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건재함이 단연 돋보인다. 추리소..
워터멜론 슈가에서 | 리처드 브라우티건 | 비채 일곱 가지 태양이 뜨는 마을에서 펼쳐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마을의 모든 것은 워터멜론 슈가에서 시작된다. 태양 아래 날마다 서로 다른 일곱 가지 빛을 발하며 반짝이는 워터멜론 즙을 짜내 불에 졸여 얻어 낸 슈가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편히 쉴 수 있는 오두막,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들판… 까지도.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이 모든 행위는 단순한 노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착실하게 삶을 일궈나간다는. 그들이 살고 있는 워터멜론 슈가로 둘러싸인 마을, 아이디아뜨(iDEATH)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다. 지극히 유토피아적이면서도 자연친화적 면모가 도드라진다. 그러나 더없이 이상적이고도 평화로운 배경이 무색하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사랑을 하고 배신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현대 미국 단편 문학의 가장 빛나는 성취 인간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납득하고 이해하기를 바란다. 이 순간, 이 사람, 이 관계,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을 납득하고 이해하기를, 때로는 이해받기를 바라 마지않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인간의 기본값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는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더러는 자기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인간은 매 순간 이해하기를 멈추지 않는데, 그 불가능함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시도해 나가는 과정 안에서 삶은 안정적으로 진행 중이라는 것이 유독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마치 삶이 불가해한 것인 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라도 한 것처럼.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실린 열 편, 그 안에 등장하고 ..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셸리 | 문학동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랑켄슈타인이 과학기술로 자멸해가는 인류에 던지는 최초의 경고 소설 속 주인공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실험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가 창조한 피조물은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과 극심한 혐오감 속에서 좌절과 분노를 거듭하다 결국 창조주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그의 가족을 하나씩 죽여 나간다. 문득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뜻에 따라 또 다른 괴물, 그러니까 동반자를 만들어 주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괴물은 그렇게만 해준다면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고 가급적이면 인간 사회 바깥의 외진 곳에서 살아가겠다고 애원하다시피 말하지 않았었던가.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이와 같은 참담한 비극은 없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제안임..
케이크와 맥주 | 서머싯 몸 | 민음사 실존 인물, 문단의 내막 적나라하게 묘사해 세간에 파장을 일으킨 풍자 소설 성공과 창작의 곡예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케이크와 맥주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던 로지. 세간 사람들은 그녀의 부도덕함을 수군댔지만, 정작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저 자신이 관심 있고 흥미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갔을 뿐.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철없는 여인이라고 해두기에도 마땅치 않다. 그녀가 내뱉은 말에 담긴 가치관이 확고한 까닭이다. 그녀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식대로 삶을 충실하게 이끌어 간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다른 남자에게 고가의 선물을 받아온 로지에게 어셴든은 분개하며 따지려 들지만, 그녀는 ‘우아하고 상냥하게’ 대응한다. “아이 참, 왜 다른 사람들 일로 속을 ..
그리운 메이 아줌마 | 신시아 라일런트 | 사계절 "눈부시게 하얀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낡은 트레일러에서 나는 마침내 집을 찾았다." “메이 아줌마의 영혼인, 눈부시게 새하얀 바람개비 ‘메이’”(p.118)가 바람결에 돌아가는 걸 바라보면서 서머와 오브 아저씨는 무얼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는 기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바람개비처럼 메이 아줌마 역시도 훨훨 자유로이 날아가시기를. 이제 자신과 오브 아저씨도 그간의 슬픔은 묻어두고 대신 아줌마와 함께해서 좋았던 기억, 사랑만을 마음에 담아 꿋꿋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도 했으리라. 그리하여 오늘까지 흘린 눈물방울들은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반짝이는 결정이 되어 산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이 자리하게 될 것이라고도 나는 믿기로 했다. 이야기의 마지막, 클리터스는 축복을 내린다. “영혼의 소리가 담고 있는 ..
클라라와 태양 | 가즈오 이시구로 | 민음사 인간 소녀 조시와 그녀의 동반자가 된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 두 존재가 그려내는 가슴 저미는 슬픔과 사랑,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의 이야기 인공지능 로봇에게 마음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가당치 않은 소리라고 여기면서도 클라라에게만은 예외를 두고 싶어 졌던 건, 어째서일까. 제 아무리 인간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뛰어난 에이에프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더욱이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로봇 제품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 에이에프 클라라가 자신을 택한 아이를 위해 애쓴 모든 것들을 ‘마음’을 빼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클라라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뒤에 우연히 재회하게 된 매니저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시를 위해서 제가 할 ..
이선 프롬 | 이디스 워튼 | 민음사 애정 없는 결혼 속에서 ‘낡은 폐선’처럼 살아가는 이선 프롬 도덕과 윤리의 이름으로 억압해 버린, 우리 내면의 슬픈 자화상 소설 속 ‘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통해 그 자신이 여러 사람들에게서 전해 듣고,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기도 한 이선 프롬과 두 여인(지나, 매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난 더 큰 액자 밖에서 이선 프롬이라는 인물의 감정선에 자연스레 몰입하게 된다. 이는 곧 마음속에 드리운 그림자를 가만히 응시하는 일이기도 할진대, 이를테면 삶 속에서 – 그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 억압되기 마련인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과도 같으리라.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타당한 일이지만, 그것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