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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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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 이디스 워튼 | 민음사 미국 문단에서 여성의 성적 열정을 다룬 최초의 본격 문학 열여덟 살의 소녀 채리티가 어엿한 여성으로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디스 워튼의 소설, 『여름』.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싱그러운 여름날 채리티 앞에 나타난 건축가 하니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숭고한 계절의 흐름은 때가 되면 여름을 보내줘야 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마찬가지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결단한다. 자신을 산에서 데려온 후견인 로열과 미래를 함께하기로. 앞서 말했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만남과 사랑, 헤어짐의 과정 안에서 드러나는 채리티의 심리적 성장에 있다. “모든 게 지긋지긋해!”(p.8)라며 불만하는 것으로 등장하던 소녀가 다른 여인과 약혼한 연인에게 오랜 고심 끝에 보낸 몇 줄 편지에는 그로..
1984 | 조지 오웰 | 민음사 21세기, 고도의 정보화 사회에 던지는 조지 오웰의 경고 거대한 지배 체제하에 놓인 개인이 어떻게 저항하고 어떻게 파멸해 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디스토피아 소설 거대한 암흑세계에 발 디딘 기분이 참담하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며 검열과 세뇌를 일삼는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잠시나마 상상해 본 것이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p.114)를 갈망하던 윈스턴 스미스는 결국, ‘행복한 몽상에 잠겨’(p.416) ‘그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p.417)히는 순간에 다다른다. 그것은 곧 영혼의 말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체제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저항하며 자유를 희망했지만, 함정에 빠져 거대한 지배 세력에 끝내 굴복하고 말았으므로. 그렇기에 ..
내 휴식과 이완의 해 | 오테사 모시페그 | 문학동네 일 년간 잠을 자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삶에 휴식과 이완을 부여하기 위해 일 년간 잠을 자기로 결심한 주인공을 처음 만났을 때, 문득 최승자 시인의 오래된 시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까무러쳤다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라 절규하던 마지막 행이 그것이었다. 차마 죽기는 뭣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일정 기간 동안 지금의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상황을 진정시키고 싶은 욕망. 그것은 차라리 삶에 대한 애착에 기반한 비명이고 몸부림이었다고 나는 이해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일 년간 잠을 자는 계획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를 – 낯선 작가의 소설 안에서 - 조우했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 현재의 고통을 딛고 일어나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바람으로 이 ..
축복받은 집 | 줌파 라히리 | 마음산책 줌파 라히리의 첫 소설집 퓰리처상, 펜/헤밍웨이상 수상작 인간 존재와 그 내면, 나아가 그들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돋보인다. 이를테면 어떤 상황 하에 직면해 있는 등장인물들은 그들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는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분노하고 실망하며 당혹스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보람과 기쁨, 안도감을 맛보기도 한다. 또한 타인의 새로운 시선을 통해 익숙했으나 낯설어진 세계에 맞닥뜨림으로써 자신은 물론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하루를, 일 년을,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의 이야기 끝에서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새로이 시작된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각기 사정과 처해 있는 상황이 다름에도, 우리..
우먼 인 윈도 | A.J. 핀 | 비채 “내가 본 것은 정말로 살인사건이었을까?” 애나는 광장공포증으로 인해 향정신성 약물과 술에 의지한 채 집 안에서만 생활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러셀 가족의 집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되면서 위태로웠던 그녀의 삶은 한층 위기에 빠진다. 자신은 분명하게 목격한 것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애초에 발생한 적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는 까닭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극도의 혼란과 불안에 빠진 한 인간의 모습은 저자의 치밀한 심리 묘사 안에서 보다 현실감 있게 구현되고 있다. 더욱이 모든 내막이 서서히 밝혀지기까지 스릴러라는 장르에서 흔히 기대하기 마련인 적당한 긴장감은 육백 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오랜만에 읽은 스릴러 소설 『우먼 인 윈도』. 읽는 순간만..
숨 | 테드 창 | 엘리 낯선 테크놀로지가 넘쳐나는 새로운 세상을 앞둔 우리에게 독보적 상상력과 예언적 통찰로 무장한 소설가가 던지는 질문 "그리하여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이 가지는 절대적 영향력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응시하게 한다. 인류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까닭이다. 표제작 「숨」을 비롯한 아홉 편의 이야기가 우리 가슴에 자못 서늘하게 다가온다면, 결국 우리 스스로가 그 길 위에서 일말의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우주 안의 모든 생명들이 가지는 경이로움을 되새기는 한편 인간 외 종과 상호작용하며 공생할 수 있는 문명의 길을 찾아 나서야 마땅하리라. 더불어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미래 사회로의 길 도처에서 마주할 유혹과 자만,..
내가 있는 곳 | 줌파 라히리 | 마음산책 대부분 외롭지만, 가끔은 온기를 느끼고 가끔은 온전히 나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순간의 기억들 어떤 장소에서 마주한 상황,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과 그것의 미묘한 변화가 짤막한 이야기 안에 응축돼 있다. 다소 쓸쓸해 보이지만 그 고독을 쉬이 포기할 수 없어 보이는 ‘그녀’가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다. 그녀의 발길이 닿는 곳을 따라 장소는 계속 바뀐다. 그리고 그 공간들은 그녀가 일상을 영위하는데 스치고 잠시 머무는, 때로는 한동안 머물기도 하는 평범하고도 친근한 장소들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집과 집 근처 보도, 공원, 다리, 광장이 배경이 된다. 서점과 박물관, 수영장과 뷰티숍, 슈퍼마켓, 카페, 역 등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짤막한 이야기 속 배경은 흐려 보인다. 그저 그 장소에 놓인 그녀와 때때로..
나는 언제나 옳다 | 길리언 플린 | 푸른 가장 짧고 가장 섬뜩하고 가장 강렬하다 수전을 믿어요, 나를 믿어요? 누구 말을 믿을 지는 아줌마 마음에 달린 거죠. 마일즈의 당돌한 물음이 당혹스럽다. 그것은 느닷없이 뒤통수 한 대를 갈겨 맞기라도 한 듯한 의식의 각성을 동반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진실의 진위 여부를 알아채고자 하는 노력조차 무의미하게, 이야기는 제 말만 하고 가차 없이 마침표를 찍고 있기에 한결 막막하기까지 하다. 물론 소설 속 ‘나’ 역시 혼란스러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외려 쉬이 마음을 결정한 듯 보인다. 어쩌면 그녀가 놓인 처지는 파헤쳐 진실을 아는 것 보다 이렇게 된 이상 마일즈의 말이 진실이기를,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사건에 일절 연루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