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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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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이저벨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택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어려움에 관해 빛나는 고결함과 유머로 써내려간 소설 딸 에이미와 엄마 이저벨은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 관계에는 미묘한 어긋남이 자리한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친밀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도무지 가 닿을 수 없는 간극이 모녀가 보낸 무더운 계절 안에서 한층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질식할 듯 뿜어내는, 그럼에도 이미 익숙해져 버린 유황 냄새에 장악당한 그녀들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만큼이나 끈질기고도 지독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바보 같은 자신들의 삶이 고단하고 구역질났지만 서로 찰싹 들러붙어 있”(p.313)을 수밖에 없다고 한 이 관계에 대하여 자연스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비단 모녀 관계의 일만은 아니..
맡겨진 소녀 | 클레어 키건 | 다산책방 애정 없는 가족으로부터 먼 친척 부부에게 떠맡겨진 소녀가 인생 처음으로 마주하는 짧고 찬란한 여름 부모 사랑을 모르고 자란 소녀가 — 아이가 없는 — 먼 친척 집에서 머물며 마주한 세계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p.24, 25)었고, 아저씨가 손을 잡았을 때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p.69, 70)면서도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p.70)이고 있는 것을 알아챈다. 그렇게 소녀는 맡겨진 집에서 낯선 감정을 느끼며 “이런 기분을 또 언제 느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지만 그랬던 때가..
침묵 | 엔도 슈사쿠 | 바오로딸 그리스도교 박해의 시련 속에 배교를 강요당한 고뇌의 여정 이교도의 나라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뿌리내리게 하고자 선교 활동에 나선 성직자들이 있었다. 1637년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 세바스티안 로드리고가 그중 한 사람으로 동료 신부인 프란치스코 가르페와 함께 마카오를 거쳐 일본으로 향했는데, 거기에는 앞서 떠난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에 대한 진위를 살피기 위함도 있었다. 그렇게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로드리고 신부가 마주해야만 했던 — 그리스도교 박해의 시련 속에 배교를 강요당한 — 고뇌의 여정을 따른다. 그 여정을 밟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레 하느님의 침묵에 대하여 묵상해 본다. “하느님께선 무엇 때문에 이런 괴로움을 내려주십니까?”(p.94) 읍소했던 기치지로의..
연인 | 마르그리트 뒤라스 | 민음사 베트남에서의 가난한 어린 시절과 중국인 남자와의 광기 서린 사랑 그 아련한 이미지들을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로 되살려 낸 자전적 소설 무더위만큼이나 뜨거운 욕망에 사로잡혔던 프랑스인 소녀와 중국인 남자의 사랑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관능적 문장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일찍이 소녀는 남성용 모자를 쓴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며 퍽 마음에 들어 하는 한편 어딘가 달라진 스스로의 일면을 알아챈다. 그러고는 이내 예감한다. “밖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모든 시선에 자신을 드러내고, 도시와 도시를, 길과 길을 싸돌아다니며 자신을 굴리는, 욕망에 자신을 맡기는 여자”(p.20)가 되리라는 것을. 이후 소녀는 메콩 강을 건너 기숙학교로 돌아가기 위한 나룻배에서 리무진을 탄 중국인 남자를 만난다. 하..
베어타운 | 프레드릭 배크만 | 다산책방 쇠락한 작은 마을, 베어타운 가슴에 곰을 품은 사람들의 좌절과 용기, 눈물과 감동으로 얼룩진 단 하나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 이제 막 베어타운을 벗어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 든다. 베어타운과 그곳 사람들 틈에서 며칠 밤낮을 분노와 좌절, 기대와 감동의 어느 사이를 분주히 헤매며 돌아다녀야 했으므로. 그 숨 가빴던 시간들을 돌이켜 봤을 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진부해서 시시하다고… 너무도 작위적인 게 아니냐고 곧잘 불평하기도 했지만, 그곳 사람들에게 하키가 ‘초월을 느끼는 몇 번의 순간들’(p.205)을 위하여 제 몸을 기꺼이 내던지는 인생에서 놓아버릴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듯, 우리 삶에서 희망을 제한다면 도무지 살아갈 의미가 무에 있으랴. 우리 모두는 그 순간을..
야간비행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 문학동네 고독과 죽음에 맞서 미지의 세계를 정복해나가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숭고한 용기에 바치는 찬가 우편기를 몰고 밤하늘을 비행하는 조종사 파비앵과 전 항공 노선을 총관하는 책임자 리비에르의 시선 끝에서 자기 초월을 향한 인간의 놀라운 마음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어둡고 적막한 밤과 한바탕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파비앵은 밤의 무수한 위협 속에서도 그 안에 깃든 아름다움을 좇는데 기꺼이 조종간을 부여잡는다. 밤하늘이 선사하는 어둠 속의 반짝임, 그로 인한 벅찬 감정, 황홀함이 그를 단단히 사로잡은 것이리라. 리비에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밤의 풍요로움을 말한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바닷속에 감춰진 보물처럼 밤의 깊은 어둠 속에 파묻힌 보물들을 생각’(p.100)하..
오두막 | 윌리엄 폴 영 | 세계사 모든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곳 맥은 가족 캠핑으로 머물렀던 야영장에서 막내딸 미시를 유괴당한다. 경찰의 수사 끝에 숲 속 낡은 오두막에서 찢어지고 피에 젖은 미시의 빨간 드레스를 발견하지만, 시체는 끝내 찾지 못한다. 그러나 현장에 놓여 있던 점 5개가 찍힌 무당벌레 핀이 미시가 연쇄 유괴범의 피해자가 됐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고, 사건은 피살 추정으로 공식 종결된다. 4장까지의 주요 내용이다. 갑작스러운 실종에 이은 살해는 여느 추리 소설과 다를 바 없는 흐름이었고, 으레 사건의 감춰진 진실을 밝히는 일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전개는 매우 의외였다. 사건 발생으로 부터 3년 반이 지난 어느 날, 여전히 거대한 슬픔 속에서 살고 있던 맥에게 하나님의 편지가 도착한다. 맥은 하나님의 뜻에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 다산책방 기억은 우리를 배반하고, 착각은 생을 행복으로 이끈다… 왜곡된 기억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파국적 결과를 다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토니 웹스터.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 )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없지 않았던가'(p.242, 243) 라고 고백할 만큼 잔잔했던 그의 삶이, 일순간 혼돈에 빠지고 만다. 그 시작은 노년의 어느 날, 고교시절 친구였던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그 앞으로 남긴다는 유언장이 도착하면서부터다. 토니는 대학시절 자신의 여자 친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