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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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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 민음사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일상의 의미와 자유에 대해 심도 깊게 파고든 수작 사흘간의 휴가 동안 모래땅에 사는 곤충 채집에 나선 남자(니키 준페이). 그가 S역에서 내려 다다른 곳은 해안가 모래 언덕에 자리한 마을로, 어느 노인에 이끌려 한 여인의 집에서 신세 지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계략에 빠지고 만다. 그리하여 남자는 모래 구덩이 속에 집을 짓고 살면서 계속해서 날라와 쌓이는 모래를 끝없이 퍼 나르며 살아가고 있는 이 기묘한 마을이 자신을 더욱 교묘하게 속박하고 억압하고 있음에 분노하며 오직 탈출만을 꿈꾸는 나날을 보낸다.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p.19)를 따라 자신 역시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한동안을 보내리라는 기대는 그렇게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키친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바나나 열풍을 일으킨 일본 신세대 문학의 신화 요시모토 바나나의 대표작 할머니를 영영 떠나보낸 미카게는 걷잡을 수 없이 널뛰는 감정들에 곤혹스러워하며 신에게 빈다. “아무쪼록 살아갈 수 있도록.”(p.50) 그러나 그 기도는 사실 자신을 향한 주문이고 다짐이지 않았을까. 나는 그 순간에 그녀가 텅 빈 집이 아니라 유이치와 에리코 씨가 있는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는 게 어찌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분명 상심의 고통 속에서도 적잖은 안도가 됐으리라. 떠나간 이에 대한 극심한 슬픔을 견뎌야 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곁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필시 위로가 됐을 것이니 말이다. 후일,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빠였다가 엄마가 된 에리코 씨를 떠나보냈을 때의 유이치 역시 미카게의 존재가..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 무라세 다케시 | 모모 열차 탈선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순식간에 잃은 사람들 그 애절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 가마쿠라시에 봄 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던 그날, 급행열차 한 대가 선로를 벗어났다. - p.7 절벽 아래로 떨어진 열차는 한순간에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된 유가족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끌어안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두 달 가량이 흐르고, 사고로 잃은 소중한 이와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채 이별의 한 마디조차 나누지 못한 남겨진 이들의 황망함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심정으로 읽는 내내 이 소설을 마주했다. 더욱이 지치고 벅찬 현실 앞에서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고 외려 소홀하고 외면..
용의자의 야간열차 | 다와다 요코 | 문학동네 결락과 불협화음으로 문학의 틀을 깨고 언어와 언어 사이의 경계를 걷는 작가 다와다 요코의 대표작 당신은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어둠을 가르며 어디론가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들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건네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며 부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한 것은 없다. 오직 달리는 야간열차에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이다. 익숙한 듯 낯선 세계를 향한 이 여정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가 아닌 ‘당신’이 돼 버린 순간 이 여행은 당신 스스로를 목적지로 한, 그렇기에 - 당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한 - 좀처럼 그 끝에 다다를 수 없는 무한의 여정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동시에 한 걸음 ..
가면의 고백 | 미시마 유키오 | 문학동네 일상성을 칼로 베어버리는 강인한 낭만주의자가 써내려간 고백문학의 정수 입때껏 만나온 소설 안에서 작가의 자기 고백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허구적 요소가 보태어지기 마련이지만 대개는 과거 일화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 성격을 띤다. 다만 미시마 유키오 소설의 특이점이 있다면, 가면이라는 수단을 통해 일반적 의미가 지니는 고백을 전복시키고 그 이면의 진실을 구하고자 하는 데에 있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출생부터 성인이 된 시점에 이르기까지, 마음 깊숙이 관통하고 있는 무언가를 향한 몰두와 채근의 일화들을 특유의 날카로우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스스로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자기 노력인 동시에 본연의 자신에 가닿고자 하는 자기 나름의 탐구의 ..
만년 | 다자이 오사무 | 민음사 흔들리는 존재를 끌어안는 영원한 청춘 문학 다자이 오사무 문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만년』은 그가 이십 대에 발표한 열다섯 편의 초기작을 엮은 창작집이다. 그런 까닭에 젊은 감각 특유의 솔직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하면서도 거침없는 면모들이 그의 필체와 다방면적인 시도들을 통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안에서도 단편 「추억」과 「어릿광대의 꽃」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함으로써 이끌어낼 수 있었던 자기 고백이기도 해서 사소설로도 널리 알려진 『인간실격』과 맥을 함께하며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다. 더욱이 개인의 욕망과 집착, 실패와 좌절, 그로 인한 고뇌의 순환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내적 모순의 양상은 불확실성이 가득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한 불안의 서사와 맞닿아 한층 흥미롭게 다가온다. 만..
낮술 | 하라다 히카 | 문학동네 “어른에게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면 좋겠다.” 술을 곁들인 점심 식사는 이누모리 쇼코에게 ‘유일한 사치(p.44)’다. 밤새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곁을 지켜주는 일을 하는 그녀에게 한 끼 식사는 무사히 일과를 마친 것에 대한 수고의 의미이자 내일의 자신을 응원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인 셈이다. 그런 까닭에 메뉴를 신중하게 정하고, 음식 맛을 돋우는 적절한 술을 고르는 일은 단순해 보여도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다. 기왕이면 음식 본연의 맛을 충분히 음미하면서 한 잔 낮술로 하루의 노고를 치하하겠다는. 그런데 실은 이것 말고도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혼 뒤에 아이를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슬픔과 상처, 그 무거운 짐을 그때만이라도 잠시 내려놓고 언젠가 함께 ..
새들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새가 너에게 무언가를 전하러 왔다면, 그건 엄마가 보내는 영원한 메시지야.” ‘조금은 불완전했지만, 흔들림 없이 함께였고, 즐거웠’(p.58)던 가족, 그러나 이제 남은 사람은 마코와 사가 단둘뿐이다. 다카마쓰 씨를 잃고, 사가의 엄마, 마코의 엄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 두 아이만이 오도카니 이 세계에 남겨진 것이다.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한 여린 아이들이 감당해야만 했을 슬픔의 크기, 앞날의 막막함이 어땠을는지 가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일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데에 있지 않았을까. 대학생인 마코는 배우로서 연극 무대에 서는 것으로, 사가는 빵을 만드는 일을 해나감으로써 각자의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면서도 쉬이 떨쳐버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서로가 있기에 버텨낼 수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