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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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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가장 개인적인, 가장 보편적인 기억과 기록의 주인공 '나'라는 소우주를 탐색하는 여덟 갈래의 이야기 “기억이란 때때로 내게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 중 하나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 p.79 「위드 더 비틀스(With the Beatles)」 중에서 ‘나’는 자신만의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날의 일을 돌이켜 보는 순간, 당시와는 조금 다른 결로 그때의 기억이 다가옴을 느낀다. 그것은 변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월의 흐름 속에서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고 그 안에서 차츰 다듬어진 내면의 변화에서 그 연유를 찾아야 하리라. 그렇기에 그 흐름에 위화감이 드는 일은 없고, 외려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만 하다. 도무지 불가해했던 일마저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수긍이 갈 ..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 무라카미 하루키(글)·이우일(그림) | 비채 아트 컬래버레이션으로 만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화적 상상력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저주에 걸린 양 사나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연 무사히 저주를 풀고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을지, 오랜만에 아이처럼 순수한 감수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해 주었다. ‘양 사나이의 세계가 언제까지나 평화롭고 행복하기를’로 맺는 이야기 안에서, 양 사나이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속한 이 세계의 안녕도 더불어 기원해 보면서. 참고로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래된 단편(1985년 作)에 일러스트레이터 이우일이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살린 그림을 더해 완성한 책이다. 하숙집에 돌아오자 우편함에 양 그림이 그려진 크리스마스카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카드에는 ‘양 사나이 세계가..
사양 | 다자이 오사무 | 민음사 일본의 패전과 몰락 계급의 비극을 여성의 목소리로 그린 페미니즘적 작품 패전 후 일본 사회는 급변했고, 그 가운데 귀족의 몰락은 두드러졌다. 귀족 집안의 일원인 가즈코와 나오지 역시 그 혼란의 소용돌이를 피해 가지 못한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그들의 행보에 있다. 그 말인 즉,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남매이면서도 처해진 현실에 대응해 나가는 방식만은 사뭇 다른 까닭이다. 때때로 우리는 삶 속에서 느끼는 슬픔과 고통, 그로 인한 고뇌를 딛고 서서 반드시 결단해야만 하는 어떤 선택의 기로 앞에 놓이곤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현되는 환경 또는 심경의 변화나 내외적 성장 혹은 파멸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 전형이 그들의 삶을 향한 각기 다른 선택을 통해 한층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 무라카미 하루키 | 민음사 출간 35주년 기념 완전판 평행선을 그리던 두 이야기가 맞닿는 충격적인 결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교차하며 전개되는 형식 안에서 내심 어떤 접점을 발견하고자 내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안달할 일이 아니었다. 구태여 그리하지 않아도 우리 각자가 삶 속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 두 이야기로 스미는 까닭에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가닿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즉, 두 세계가 서로를 개의치 않고 나아가는 듯 보여도 결국은 한 가지, 그곳이 어디든 간에 나란 사람과 그 존재가 담고 있는 진심, 동시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까지도 감내할 수 있는 의지 혹은 용기에 대한 이야기로 모아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녹나무의 파수꾼 | 히가시노 게이고 | 소미미디어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세대를 뛰어넘는 마음, 그렇게 과거와 미래가 이어진다 레이토는 월향신사의 녹나무 지키는 일을 하기로 한다. 고아인 데다가 직업도 없고, 절도죄로 유치장에 수감 중인 처지여서 다른 선택지는 없는 까닭이다. 그렇게 시작된 파수꾼의 일은 의문투성이지만, 녹나무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오로지 스스로 알아내야만 한다. 레이토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월향신사를 찾는 방문객들과 조우하면서 차츰 녹나무가 지닌 비밀에 다가간다. 소설의 마지막, 치후네는 레이토를 향해 묻는다. 자신이 앞으로 조금 더 살아가도 괜찮을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하여. 이에 레이토는 지금 자신의 기분을 녹나무에 예념해 그녀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치후네는 그 마음 씀씀이에 고..
조용한 비 | 미야시타 나츠 | 위즈덤하우스 기억하지 못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해도, 우리 둘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함께 보낸 오늘이 내일이면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마음 한 켠이 시리고, 또 아려 온다. 그것은 곧 일상 속 기쁨과 슬픔을 비롯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소소한 감정들을 공유할 수 없다는 데에 대한 진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일 것이다. 소설 속 유키스케와 고요미 사이에서 흐르는 시간들은 오직 유키스케의 기억에서만 저장되고 있다. 그로 인한 답답한 마음에 그녀에게 모진 말을 하기도 하는 유키스케지만, 결국 그런 고요미와의 삶을 기꺼이 받아 들이기로 한다. 그것은 둘이 함께 하루하루 진심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는 진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럴 것이라는 굳은 믿음 덕분에 가능했으리라. 어느 날의 우연한..
주주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맛있는 햄버그 속에는 누구도 만질 수 없는 기적의 공간이 있다." 오랜만에 읽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언제나처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하게 한다. 이야기에 깃든 치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햄버그 스테이크 가게 ‘주주’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도우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시간들 속 노력은 착실하게 쌓여 지난날의 상처를 조금씩 아물게 하고 새 살도 오르게 한다. 흔히 이 일련의 과정을 두고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라는 문장 안에서 이해하곤 하는데, 어쩌면 그것은 삶의 민낯을 확인하는 일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온전하게 감당해야 할 시련의 몫이 늘 우리 곁..
그래도 우리의 나날 | 시바타 쇼 | 문학동네 139쇄가 발행되고 189만 7700부가 판매된 일본 현대소설의 고전 어떤 작은 행위가 짐작조차 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우리 삶엔 왕왕 있다. 물론 어떤 때에는 직감적으로 전해오는 미묘한 불안감이나 초조감을 감지하기도 하지만, 그 마저도 너무도 순식간의 일이라 금세 잊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러는 마음 한 켠에 담아두고 있으면서도 애써 잊고자 하는데, 어느 쪽이 됐든 결과적 의외성이나 그 파장의 크기를 짐작하기는 어려우리라. 우리는 이 기묘함을 두고 어떤 우연이 일련의 흐름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 어쩌면 이 모든 게 실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필연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훗날 이해하게 된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들른 헌책방에서 마주한 H전집이 ‘나(후미오)’에게 그랬다. 모든 것이 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