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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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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을 드세요 | 오가와 이토 | 북폴리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기분 나쁜 일도 괴로운 일도 그때만큼은 전부 잊을 수 있으니까 소중한 사람과 한 식탁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시간이 또 어딨을까. 여기 엮인 일곱 편의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해서 쉬이 잊고 마는 일상 속 행복의 진리를 마주하게 한다. 나아가 마음 한 켠을 따뜻하게도 든든하게도 만드는데, ‘그녀의 소설은 다 읽고 난 뒤에 “잘 읽었습니다” 대신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해야 할 것만 같다.’고 말한 옮긴이의 말에 십분 공감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에서다. 치매로 요양원에 모신 할머니가 식음을 전폐하자 한달음에 후지산을 닮은 빙수를 구해온 손녀와 요코하마 주카가이의 낡았지만 생전 아버지가 칭찬해 마지않던 음식점에서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프..
태엽 감는 새 연대기 | 무라카미 하루키 | 민음사 세계의 태엽을 감는 것은 누구인가? 수수께끼와 탐색의 집요한 연대기 어느 날 홀연히 출근 모습 그대로 사라진 아내를 되찾기 위한 한 남자(오카다)의 지난한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 녹록지 않은 과정에 비례하는 방대한 양은 늘 그래 왔듯, 견고한 짜임새와 흥미로운 이야기 안에서 한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더불어 우리가 삶 안에서 이따금 마주하곤 하는 어떤 –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 기이한 흐름들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이를테면, ‘어딘가 멀리서 뻗어 나온 긴 손’(p.837)에 대한 것이 그렇다. 옅은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하며 혹은 까맣게 모르고서 지나쳐 온 일들이 실은 투명한 줄에 줄줄이 매달린 하나의 뭉텅이였음을 깨닫는 찰나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
좀도둑 가족 | 고레에다 히로카즈 | 비채 가족을 넘어 ‘인연’을 말하는, 여름을 닮은 소설! 세상을 바라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선과 감성을 좋아한다. 거창하고 대단한 무언가가 아닌, 우리 주변 어디에서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평범하고 소박한 소재를 더없이 잘 풀어내는 이유다. 더욱이 가족이란 무엇일까,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는데, 뒤바뀐 아들을 대하는 부모의 심정과 심경의 변화를 통해 자식과 부모의 관계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했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배다른 동생을 받아들이는 세 자매가 비로소 네 자매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최근 『어느 가족』이라는 타이틀로 개봉한 영화 역시 비슷한 선상에 있다. 『좀도둑 가족』은 영화 『어느 가족』을 고레에다 감..
반딧불이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반딧불이 같은 청춘의 빛 그 아름다운 스무 살의 날들을 이야기하는 하루키 문학의 원류 # 01. 「반딧불이」 적막한 어둠 한가운데 작은 빛이 감돈다. 반딧불이가 머물다 간 자리다. 그곳을 지긋이 바라보며, 그게 삶의 신비라는 것을 순간 확신했다. 삶의 어느 순간에도 쉬이 지지 않을 수 있는 건, 모두 그 덕택이라고. 그렇기에 그 작은 빛을 최대한 꺼뜨리지 마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최소한의 소임일 거라고. 그러나 작은 빛은 언젠가 힘을 잃게 돼 있다. 결국 어둠 속에 스미고 말 것이므로. 그러나 그것 역시 삶의 일부임을 안다. 「반딧불이」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청춘의 한낮 속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상기하게 한다. 반딧불이가 사라진 후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안에서 오랫동안 ..
저물 듯 저물지 않는 | 에쿠니 가오리 | 소담출판사 낮도 밤도 아직은 가거나 오지 않았다 느긋하게 울렁이는 어스름한 녘이다 쉰이라는 나이에 책 읽는 것 외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주인공 미노루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일상을 그린 『저물 듯 저물지 않는』에는 별다른 이야깃거리랄 것이 없다. 그저 흘러가고 있는 보통의 나날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그 점이 외려 에쿠니 가오리만의 산뜻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 안에서, '소설 속 소설'이라는 독특한 형식 안에서 한층 빛을 발하는 인상이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은 일상 안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생각 혹은 감정들을 서슴없이 털어놓곤 하는데, 그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솔직한 면면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가령, 미노루와의 부부 비슷한 생활 안에서 누렸던 자유를 호언했으면서도 '진짜 부부', '진짜 가족'을 원해 그의 곁을 떠났던..
츠바키 문구점 | 오가와 이토 | 예담 아름다운 손편지로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츠바키 문구점의 가슴 뭉클한 기적 츠바키 문구점은 별도의 대필 간판은 걸어두고 있지 않지만 집안 대대로 편지 쓰는 일을 해왔다. 아메미야 하토코는 선대가 돌아가시고 일을 돕던 ― 선대와 일란성 쌍둥이인 ― 스시코 아주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자, 고향 가마쿠라로 돌아와 츠바키 문구점에서 편지 대필하는 가업을 이어간다. 대필을 의뢰하는 다양한 이들 만큼이나 그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조문을 위한 편지나 생일 축하 카드, 부탁을 거절하는 답장 외에도 단순히 안부를 묻고자 하는 평범한 편지까지. 하토코는 선대가 그래 왔듯, 대필을 의뢰하는 사람의 특성과 상황, 편지의 목적 등 여러 면을 심사숙고하여 그에 알맞은 필기구, 편지지 재질과 크기를 정한다. 그리고 잉..
기사단장 죽이기(전2권)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현실과 관념의 경계를 꿰뚫는 이야기의 힘 대범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무라카미 하루키 월드의 집대성 현현하는 이데아와 전이하는 메타포의 방대한 서사가 펼쳐진다. 그 중심에는 저명한 일본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가 있다. 삼십 대 중반의 초상화가인 '나'는 그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이내 '이 그림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권 p.110)고 직감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 앞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과 비현실, 가상과 실재, 실제와 환상을 넘나드는 세계 안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당면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야만 한다는 믿음만이 존재할 뿐.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는 혼란과 시련, 상실의 연속 안에서도 삶을 다시금 ..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오기와라 히로시 | 알에이치코리아 전할 수 없었던 마음, 지울 수 없는 후회… 인생 한 켠에 남아 있는 아련한 기억을 소환하다! 소설집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 실린 여섯 편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는 가족의 이야기다. 혈연으로 이어진 친밀함 너머에 자리한 미움과 원망, 후회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그것. 어쩐지 낯설지 않다. 어느 한 구석에서 시작된 시큰함이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가는 듯한 쩌릿함 마저 느껴진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자식이고 형제·자매이며 나아가 부모이기에, 그들의 얽히고 설킨 감정의 타래가 선연하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짐짓 누가 읽더라도 가슴 한 켠이 아리고 마는 단편들이 아닐 수 없다. 「성인식」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는 딸의 성인식에 참가하기 위해 한번 더 생의 의지를 다진다. 「언젠가 왔던 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