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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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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 김연수 | 문학동네 기다려, 지금 너에게 달려갈게 # 이 우주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있을까요? 10000000000000000000000개의 별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어마어마한 0들이 나열된 별의 구체적 수를 마주 하자니, 내가 바라보는 하늘에선 도대체 그 많은 별들이 다 어디로 가버린 건지 궁금해지는 거다.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 볼 적이 있는데, 환한 달 옆으로 작게 반짝이는 별 하나만 발견해도 그날 밤은 운이 좋다 여길 정도니, 새삼 그 수가 놀라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전혀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딴 세계 얘기처럼. 어찌 됐든 그저 컴컴하기만 한 밤을 마주하는 일은 매우 슬펐다. 그러므로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모두 제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을 거라고 믿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무진기행 | 김승옥 | 민음사 근대인의 일상과 탈일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해 내면서 1960년대 문학에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대표 단편 10편 서울의 제약회사에서 전무 승진을 앞두고 있는 '나(윤희중)'는 아내의 권유에 쉼 차, 고향 무진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우연하게 음악 선생이라는 한 여자(하인숙)를 만나게 되고,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여자를 무진에 그대로 남겨놓은 채, 서울로 돌아간다. 현실에 타협한 선택은 부끄러움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두고두고 스스로를 채근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그 괴롭힘은 합리화 영역 밖의 굴복의 기억인 셈이다. 그러나 이상만을 쫓기에는 우리의 삶을 제약하는 것이 너무도 많다. 이상을 추구하는 삶을 바라마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나는 곧잘 주저앉곤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
사랑이라니, 선영아 | 김연수 | 문학동네 사랑 따위는 하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소주를 살 일도, 노래를 부를 일도, 춤을 출 일도 없을 텐데. #. 01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 막 읽고서, '사랑이라니, 선영아'라고 붙인 책 제목의 절묘함에 감탄했다. 어찌 보면,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광수가 내뱉은 대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어서 별스러울 것도 없으련만, 새삼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 왜일까. 아마도 선영을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 사랑을 떠들어 대는 광수와 진우의 모습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고 느꼈던 것 같다. 적당히 진지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경쾌함과 유쾌함을 잃지 않는 흐름까지도 내포한 제목이라니, 반할 수밖에. #. 02 '사랑'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곧 소설가 김연수가 말하는 사랑론(論)일..
구운몽 | 김만중 | 민음사 몽자류(夢字類) 소설의 효시이자 시대마다 재생산되는 환상 문학의 원형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소설 중 하나인『구운몽』. 1687년(숙종 13년) 서포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집필했다고 전해지는 이 소설은, 부귀영화의 한낱 부질없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성진과 팔선녀가 꾸었던 꿈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는…… 뭐, 다들 이 정도는 알고 있을 것 같다. 나 역시도 학창 시절 교과서에 일부 실린 것을 배웠던 기억이 여태껏 남아있으니. 그때 일부 읽었던 것 이후로, 비로소 전문을 읽게 된 『구운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여전한 느낌이었다. 무료했던 수업 시간에 읽힘 당했던(?)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읽는 것이므로 조금은 색다르기를, 그러니까 좀더 흥미롭게..
세계의 끝 여자친구 | 김연수 | 문학동네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기에 앞서, '작가의 말'을 읽었고, 다 읽고 나서 한 번 더 '작가의 말'을 읽어봤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회의적이라는 말, 대부분 다른 사람을 오해한다는 말,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한 때라는 말, 그러므로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 무심결에 읽어 나갔던 것들에서, 이후 상당한 무게감을 느끼고 말았다. 일상에서 내뱉었던 '네 마음을 알아, 널 이해해'라는 말의 무게가 새삼 견딜 수 없이 육중하게 느껴진 탓이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낼 당시의 나는 추호의 거짓 없는 진심을 말한 것이었다고 여태껏 생각해 왔다. 그러나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애당초 가능한 것인지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 문학동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입양아 출신의 카밀라는 양부가 보내온 상자 안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가만히 사진 속 인물들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직감적으로 자신과 친모임을 알아채고, 그동안 묻어두었던 과거를 알아내고자 한국의 진남으로 향한다. 그러나 진실에 다가가려고 할수록 그것을 막아서는 이들의 공세에 밀려, 자신의 친모가 그랬던 것처럼 파도에, 바다에 몸을 내맡긴다. 그런데 그곳에서 지금의 자신보다 어린, 사진 속 열여덟 살 그 모습 그대로의 엄마를 만난다. 뻗은 손끝으로 엄마의 살갗을 매만지며, 그 생생한 감각 안에서 스스로가 다시 태어남을 느낀다. 그것은 진실을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그녀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는 것인 동시에 앞으로 헤쳐나갈 나날에 대한..
상냥한 폭력의 시대 | 정이현 | 문학과지성사 미소 없이 상냥하고 서늘하게 예의 바른 위선의 세계, 무서운 것도, 어색한 것도, 간절한 것도 '없어 보이는' 삶에 질기게 엮인 이 멋없는 생활들에 대하여 표지 한 편으로 가지런히 열 맞춰 놓인 활자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눈으로 읽으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상냥한데 폭력적이라니…?? 하지만 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일상에서 상냥함을 가장한 폭력의 아이러니를 겪어오지 않았던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리가 바로 그런 시대의 한가운데임을 머리보다는 가슴 깊숙이에서부터 이미 수긍하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이리라.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니, 책을 펼치는 것에 덜컥 겁이 났다. 어쩐지 그간 애써 외면해왔던 혹은 가까스로 담담하게 맞닥뜨려왔던..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 문학동네 '아주 없음'이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는 기억들 그로부터 흘러나온 미세한 파장이 건드리는 '보통의 시절' 표제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를 포함해 『조중균의 세계』, 『세실리아』, 『반월』 등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으로, 낯선 작가의 새로운 글을 읽는다는 묘한 설렘으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주변 어디에선가 목격한다고 해도 그다지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화자들과 그들에게 놓인 일상, 그 이면의 사소한 것까지도 포한한 모든 것들이, 범상치 않은 작가의 시선을 통해 재발견되고 재해석된 듯한 느낌의 글들이었다. 또한 짧은 호흡의 문장들이 모이고 모여 특유의 리듬감을 형성하면서, 읽는 이의 머릿속에서 다소 불분명하고 흐릿했던 것에 차츰 색깔이 입혀지고 선명해지는 듯했는데, 그 점이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