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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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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 조남주 외 | 다산책방 스스로를 믿기로 선택한 여성의 삶을 정가운데 놓은 일곱 편의 이야기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테두리 아래 엮인 일곱 편을 만나보았다. 그중 몇몇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어찌나 숨 막힐 듯 답답하던지, 얼마쯤은 화도 났다. 소설 속 그녀들은 인생의 한 때를 자신을 지운 채 살아왔고, 어떤 이는 그런 삶에 길들여진 나머지 안타깝게도 더 이상의 개선 의지조차 없어 보이기도 했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는 말이 더 알맞아 보였다. 나는 그 지점에서 분노에 비례하는 슬픔을 느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아내이고 며느리이고 엄마라는 굴레에 갇힌 그녀에게 정녕 자유 의지란 없는 걸까.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과감히 목소리를 낼 순 없었던 걸까, 책망하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냥 한 사람만을 탓하기에는 ..
우리가 녹는 온도 | 정이현 | 달 녹을 줄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드는 당신을 위하여 녹을 줄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드는 건 눈덩이를 굴렸던 기억, 그 안에 깃든 선한 마음 때문은 아닐는지. 그것만은 사라지지 않고 여기 어딘가에서 반짝이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오늘도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눈덩이를 굴리게 하는 거라고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혼자 혹은 둘이서, 때로는 여럿이 모여 만든 눈사람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교감하며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탐색과 노력의 행위로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수록된 이야기들을 읽자면, 자연스레 서로 다른 온도를 품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주목하게 된다. 어떤 상황 안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그들 사이에서 맺어진 긴밀한 관계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적정한 온도를 찾아가기 마련이다. 설사 그것이 도저히 불가..
사랑의 온도 | 하명희 | 북로드 "당신은 사랑을 하며 고독을 견딜 수 있습니까?" 요즘 한창 방영 중인 드라마 사랑의 온도 원작 소설이다. 원래는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던 것을 드라마 방영에 맞춰 새로운 이름으로 재출간한 듯싶다. 그래서인지, 주인공들이 PC통신을 통해 처음 만남을 시작하는 설정이 지금 읽기에 올드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었던 '나'(현수)는 단짝인 홍아에 이끌려 PC통신 요리 동호회에 가입하게 되고, 그곳 채팅방에서 정선을 만난다. 온라인 상에서의 마주침은 곧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홍아의 결혼에 '나'와 정선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정선은 자신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과 함께 좋아했었다는 과거완료형 고백을 한다. 그제야 '나'는 자..
바깥은 여름 | 김애란 | 문학동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 01 누군가는 어느 날 갑자기 뜻하지 않게 무언가를 잃었고, 다른 누군가는 도리어 아주 오래전부터 의도하고 계획했었을지도 모를 무언가를 잃었다. 『바깥은 여름』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그 찰나의 순간이 머금고 있는 깊은 상실에 대해 말한다. 그 서려 있는 상실의 여운에 대해 말한다. #. 02 어디선가 그 비슷한 얘기를 들어본 것도 같다. 그게 TV 뉴스였던가, 의도치 않게 엿들은 타인의 대화에서였던가. 습관적으로 만지작대는 스마트폰을 통해 눈대중으로 훑은 어느 기사에서 마주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것마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세계 어디에선가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라는 걸 확신한다. 어쨌든 그들은..
꾿빠이, 이상 | 김연수 | 문학동네 "다만 무한한 어떤 것 앞에서는 존재 그 자체가 중요하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애매해진다는 말입니다." 김연수 작가의 『꾿빠이, 이상』이 재판되었다는 소식 이후, 책장에 꽂아 놓은 것이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다 최근 웹서핑 중 우연히 이상의 부인이기도 했지만, 김환기의 부인이었던 변동림이었다가 김향안이 된 한 여인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이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환기 역시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 둘 사이에 이런 연결고리가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간 미뤄뒀던 『꾿빠이, 이상』을 읽게 됐다. 이상의 죽음 직후 만들어졌다는 데드마스크를 둘러싼 엇갈린 증언을 이야기 한 「데드마스크」, 철저하게..
오직 두 사람 | 김영하 | 문학동네 우리는 모두 잃으면서 살아간다. 여기,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그 이후'의 삶이 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제 막 세 돌이 지난 아이는 누군가에 의해 유괴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어떤 흔적도 찾지 못한 채,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이를 찾는 전단지 뭉치를 들고 헤매는 것뿐이다. 그 사이 아내의 정신은 흐려졌고, 가세는 기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만 찾을 수 있다면, 이 고통의 시간들은 말끔히 씻길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십일 년 후, 아이를 찾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더 잔혹하고 거대한 비극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2014년 4월의 그 참혹했던 사건은 소설가 김영하의 삶과 소설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작가는 그 기점에 놓인 작품이 ..
호텔 프린스 | 안보윤 외 | 은행나무 호텔이라는 공간을 관통하는 젊은 작가 8인의 내밀한 시선 『호텔 프린스』는 8인의 젊은 작가들이 소설가의 방에 머무르며 써 내린 단편을 엮은 소설집이라고 했다. #. 01 '호텔'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이 주는 산뜻한 설레임을 품은 글이길 바랐다. #. 02 호텔에 투숙한 이들을 엿보는 듯 하다. 그곳에서 누구는 무료 숙박 이벤트에 당첨돼서, 또 누구는 집 나간 아내를 찾아서, 또 다른 누구는 페스티발에 참여했다가, 또, 또 누구는 나선형 그림을 그리는 그를 찾아서……. 그들을 살피는 일이 ― 다소 기대에 어긋나는 흐름이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대개는 흥미로웠다. #. 03 근데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너무도 우중충해! 분위기상으로는 차라리 여관이나 여인숙에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 생각이 ..
공터에서 | 김훈 | 해냄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20세가 한국 현대사를 살아낸 아버지와 그 아들들의 비애로운 삶! 1920년대부터 1980년대, 한국 현대사는 유례없는 격동의 시기였다. 소설 『공터에서』는 그 혼란과 분열, 갈등의 비극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마씨 집안의 가족사를 담고 있다. 집안의 가장 마동수와 그의 두 아들인 마장세, 마차세가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시대의 소용돌이에 당당히 맞서기보다는 차라리 무기력하다. 처해진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애써 외면하기, 혹은 순응하는 일만이 고작인 인생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겪는 삶에 대한 부대낌은 상처와 허무만 남기고,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그렇게 질긴 운명 앞에 굴복하는 것말고는 다른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