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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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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 백수린 | 마음산책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평온했던 일상을 한 순간 깨는 일을 이따금 마주한다. 누가 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한 중대하고도 심각한 일인 경우도 더러는 있지만, 오직 자신만이 감지한 몹시 섬세하고도 여린 감정의 소용돌이일 때가 대개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불현듯 밀려온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마음 어딘가에 쌓아 두어 잠재돼 있던 것이 어떤 일이나 상황을 계기로 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하기는 하겠다. 그리고 이 같은 감정의 여파는 스치듯 이내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한동안의 자신을 사로잡을 만큼 강렬하고도 집요하게 따라 붙기도 한다. 동시에 스스로 조차 그런 감정에 대하여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도 미묘..
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 난다 우주 가장자리에서 일어나 모두가 기억하게 된, 외계인 경민과 지구인 한아의 아주 희귀한 종류의 사랑 이야기! 지구인 한아와 외계인 경민의 사랑 이야기는 현실 감각을 놓지 않으면서도 비현실의 판타지가 더해져 한층 독특하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옷을 리폼하는 수선집 ‘환생’을 운영하는 한아에게는 스무 살 때부터 11년째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남자 친구 경민이 있다.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그녀와 달리 어디로든 내키는 대로 훌쩍 떠나곤 해서 늘 한아를 기다리게 하곤 한다. 그러던 중 경민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캐나다에 유성우를 보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이후 여행에서 돌아온 경민에게서 이전과는 다른 낯선 모습들이 한아에 의해 포착되는 데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랜 시간 만남을 ..
오직 한 사람의 차지 | 김금희 | 문학동네 우리가 살아낸 모든 시간을 긍정하는 다정한 문장들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뿐이라는 생각을 한다.”(p.293)는 작가의 말이 묵직하게 와닿는다. 소설집 『오직 한 사람의 차지』에 엮인 아홉 편은 결국 이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놓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저마다의 분투, 그 과정 안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살면서 마주하는 어떤 감정들은 때때로 우리의 지난날을 곱씹게 한다. 대개는 소외돼 쓸쓸하고 못 견디게 지독하면서도 성가신, 그로 인해 얼마간은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기 마저 한 아프고 쓰린 기억들이다. 나는 그런 지리멸렬한 삶의 속성이 지니는 환멸을 뒤로하고서도 나아갈 수 있는 억척스러움이 자기 안에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살아간다’는 일의 ..
진이, 지니 | 정유정 | 은행나무 생의 가장 치열했던 사흘 눈부시게 다시 시작되는 삶의 이야기 진이의 마지막 출근과 그로부터의 3일간의 시간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불현듯 닥쳐온 불운한 사고가 그녀의 삶을 막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 안에서 그녀가 온몸으로 보여준 삶을 향한 태도는 단연 눈부시다. 그 진면목은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에 앞서 지니의 앞날을 진심으로 염려하며 남긴 당부를 통해 드러난다. 자신을 도왔던 김민주에게 남긴 편지 역시 빠뜨릴 수 없다.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쓴 추신 - 나와 지니는 오래오래 너를 기억할 거야. 네 형편없는 노래도. (p.361) – 의 두 줄 문장은 모르긴 몰라도 김민주의 마음속에서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왐바로 떠난 지니 역시도 다..
레몬 | 권여선 | 창비 레몬, 레몬, 레몬, 복수의 주문이 시작되었다 레몬의 노란 빛깔은 이를테면, 지지부진하고 때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삶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그렇기에 ‘레몬, 레몬, 레몬 읊조리던 주문은 곧, 삶의 숭고함을 가리는 것들로부터의 최후의 안간힘 같은 것은 아닐는지. 소설 『레몬』은 쉬이 놓지 않고 붙들려는 삶을 향한 의지, 그 속성에 대한 이야기다. 발단은 해언의 두부 손상으로 인한 사망에서 비롯한다. 그로 인해 그녀 주변의 인물들, 그러니까 그녀의 동생 다언과 친언니보다 더 가깝게 지내던 상희,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한만우는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삶의 균열 안에서 적잖은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으로부터 8년이 지난 뒤에서야, 다언은 한만우..
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 작가정신 우리 시대의 영원한 이웃, 박완서를 다시 만나는 시간 삶의 진리가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드러난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에 담긴 48편의 짧은 소설이 그렇다. 1970년대 한창 분주하게 산업화를 추진해가던 시기와 맞물린 급격한 사회 변화 안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넘실대는 시류에 편승해 가장 현대적인 것에 안착하고자 제 나름의 애를 썼다. 그 안간힘 속에서 계속되는 나날은 반세기를 훌쩍 흐른 오늘에 바라보아도 그리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어느 시대 건 뒤쳐지지 않고 첨단의 것을 온전하게 누리길 바라는 이들의 욕구와 열망이 전연 다르지 않고, 무엇보다 사랑과 결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란 사람을 기준으로 내가 맺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라는 형태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할..
안녕 주정뱅이 | 권여선 | 창비 절망과 구원을 동시에 노래한 시 같은 소설 행과 불행이 혼재된 일상 안에서 술은 때때로 삶을 좀먹기도 하지만, 내일을 살게도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 이런저런 이유들로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술을 마신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서 술을 마신다는 행위는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살아감의 장면들을 통해 일상 속 우리의 삶을 반추한다. # 01. 「봄밤」 자신은 온통 분모 뿐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수환은 영경에게 조금이나마 나은 존재감을 지닌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을 하면서도 독한 주사까지 맞으며 멀쩡한 척, 영경의 외출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외출의 목적이 술을 마시기 위함이고 그것은 그녀의 몸을 더 망치고 말 것임을..
82년생 김지영 | 조남주 | 민음사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혼란,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 어딘지 모르게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들춰보지 않아도 대략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82년생 김지영의 암담한 모습을 구태여 활자로까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분명 겁내 하며 회피하고 있었고. 그래서 얼마간은 비겁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또 다른 글, 「현남 오빠에게」를 우연히 읽고, 소설 속 그녀가 만남 이래 줄곧 속박 당해 왔던 강현남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걸어가겠다고 선언하는 다부진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이 책을 읽어볼 마음이 생겼으니까. 과거에 비해 남성과 여성을 차별 짓는 것들이 확연히 줄어든 시대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들의 삶을 옥죄고 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