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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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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화사상사 시간이 만들어내고, 어느덧 사라지는 도시의 담담한 슬픔과 허무! 이 책은 초기 단편소설 18편을 엮은 소설집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에게 이런 상상력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신선했던 글들이 눈에 띄었다. 최근의 글도 좋지만, 이런 면에서 초기작만의 매력을 만나볼 수 있어 새로웠다. 분명히 어딘가 나와 먼 세계에 있는 기묘한 장소에서 나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곳이 될 수 있으면 따스한 장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일 거기에 차가운 맥주가 몇 병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나는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은 나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없다. 그러한 기묘한 장소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 p.95, 96 「1963/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すみれの花の砂糖づけ(제비꽃 설탕 절임) | 江國香織 | 新潮社 일상에 문득 찾아든 시적인 순간에 태어난, 에쿠니 가오리의 또 다른 세계 평소 에쿠니 가오리 소설을 읽어 온 사람이라면, 한 번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그녀만의 색채가 강한 시집이다.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빈번하게 느끼게 마련인 쓸쓸함과 공허함에 대한 감정들을 그녀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끄집어낸 부분이 특히 주목해서 읽어 볼만 했다. 덧붙여, 일상을 바라보는 그녀만의 시선이 놀랄 만큼 솔직한 시들도 있어서, 꽤 흥미로웠다. 真実 朝、一人でのむコーヒー 雨の日は雨の日の味のする 曇りの日は曇りの日の味のする 雪の日は雪の日の味のする 晴れた日は晴れた日の味のする あの1杯のコーヒーのためだけに 生きているような気がする 진실 아침, 혼자서 마시는 커피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의 맛이 난다 구름 낀 날은 구름 낀 날의 맛이 난다..
인연 | 피천득 | 샘터사 소년 같은 진솔한 마음과 꽃같이 순수한 감성과 성직자 같은 고결한 인품과 해탈자 같은 청결한 무욕(無慾)의 수필 내가 피천득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은전 한 닢」이라는 수필을 배우면서 였다. 이 수필집 후반부에도 그 글이 있어서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어볼 수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 p.222 수업시간에도 그랬고, 참고서에도 그랬고, 문제집 속 해답지에도 이 글의 교훈은 '인간의 맹목적인 소유욕에 대한 연민'이였다. 당시의 나는 좀처럼 수긍할 수 없어했던 기억이 난다. 같은 글이라도 사람 생각은 여럿인데, 꼭 그것만이 정답인걸까. 아님 피천득 선생님이 정해준 답이었을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 | 학고재 일찍이 누가 문화유산의 정겨움을 이런 문장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가! 우리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하면 이런 황홀한 표현이 나오는 걸까, 싶을 정도의 유려한 문장들로 가득했다. 물론 이 같은 극진한 감상이 나올 수밖에 없는 문화재의 훌륭함 덕분이겠지만, 그가 칭찬했던 면면을 도판으로 나마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 동시에 그간 흘려 봤던 우리 문화재들을 직접 바라보고 내 나름의 감상을 해 보고 싶단 생각을 갖게 하게도 했다. 새삼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한국의 미술은 언제나 담담하다. 그리고 욕심이 없어서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의 재료, 있으면 있는 대로의 솜씨가 꾸밈없이 드러난 것, 다채롭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은, 그다지 슬플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덤덤한 매무새가 ..
노란집 | 박완서 | 열림원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아치울 노란집에서 다시 들려주는 이야기 그간 박완서 작가의 글들을 통해, 서울 아파트에서 벗어나 경기도 외곽의 주택으로 자리를 옮겨 흙과 나무, 들꽃과 함께하는 자연적 삶을 살며 흡족해하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에 들어왔다. 그때마다 아파트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나는 시원한 바람이 막힘없이 오가고, 계절의 순환에 따라 피고 지는 온갖 생명들과 밀착할 수 있는 전원생활을 이따금 머릿속으로 상상하곤 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노란집』은 작가가 사랑해 마지않던 아치울 노란집에서 쓴 2000년 대 초반의 글들을 묶은 책이라고 한다. 매번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거지만, 문장 하나 하나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삶에 대한 애착이 내 마음속까지도 깊이 와닿는다. 그리고 너무나..
인페르노(전2권) | 댄 브라운 | 문학수첩 '로버트 랭던'의 그 어떤 시리즈보다 강력한 책! 속도감 있는 전개와 거듭되는 반전 요소들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세계에 빠져든 랭던이 해결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거쳐가는 장소 하나하나가 허구가 아닌 실제이기에 더욱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피렌체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인페르노 1 -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문학수첩 인페르노 2 -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문학수첩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전2권) | 정끝별∙문태준 | 민음사 한국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근래 들어 마음에 드는 시가 하나 둘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시'라는 장르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러던 중 박완서 작가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소개된 시집을 보고 구입했다.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는 한국의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을 두 권에 담고 있는데, 여러 시인의 대표작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이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해설과 일러스트까지 겸해져서 가까운 곳에 놓고, 두고두고 볼 수 있는 시집이 될 것 같다. 두 권의 시집을 손에 쥐고 있는 동안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비롯해서 박두진의 「해」, 김춘수의 「꽃」, 천상병의 「귀천」 등 학창 시절 배운 시들과 근래 들어 자주 되뇌고 있..
대위의 딸 | 알렉산드르 푸시킨 | 열린책들 러시아 문학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 푸시킨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산문 예술의 정점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게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였다. 『대위의 딸』은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로 알려져 있다. 『대위의 딸』은 청년 장교 안드레이 뻬뜨로비치 그리뇨프와 대위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더불어 그리뇨프가 부임지 벨로고르스끼 요새에 가던 도중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었을 때 만난 농부가 훗날 반란군의 습격에 요새가 함락되고 처형을 기다리던 그의 앞에 왕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기이한 인연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후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밀고로 반역자로 몰려 고초를 겪기도 하지만 결국엔 해피엔딩. 내 발목에는 족쇄가 단단히 채워졌다. 그런 다음 나는 감옥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