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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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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바나나 열풍을 일으킨 일본 신세대 문학의 신화 요시모토 바나나의 대표작 할머니를 영영 떠나보낸 미카게는 걷잡을 수 없이 널뛰는 감정들에 곤혹스러워하며 신에게 빈다. “아무쪼록 살아갈 수 있도록.”(p.50) 그러나 그 기도는 사실 자신을 향한 주문이고 다짐이지 않았을까. 나는 그 순간에 그녀가 텅 빈 집이 아니라 유이치와 에리코 씨가 있는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는 게 어찌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분명 상심의 고통 속에서도 적잖은 안도가 됐으리라. 떠나간 이에 대한 극심한 슬픔을 견뎌야 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곁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필시 위로가 됐을 것이니 말이다. 후일,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빠였다가 엄마가 된 에리코 씨를 떠나보냈을 때의 유이치 역시 미카게의 존재가..
천재의 지도 | 에릭 와이너 | 문학동네 위대한 정신을 길러낸 도시들에서 배우다 저자 에릭 와이너는 천재들이 활동하던 무대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일곱 도시를 여행하면서, 한 도시의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성을 이끌어냈는가에 대하여 다방면적으로 알아가고자 한다. 『천재의 지도』는 그 여정의 결과물인 셈이다. 흔히 우리는 특정 분야에서 특출한 면모를 보이는 이들을 가리켜 천재라 칭한다. 그런데 그는 역사상 대개 한 장소에서 복수의 위대한 천재들이 배출되어 왔음에 주목한다. 개인의 능력 이전에 그와 같은 남다른 천재성이 발현될 수 있었던 환경적 요인에 대하여 살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각 도시의 역사적․사회적․정신적․문화적 요소들을 취합함으로써 천재들의 배양지로서 저마다 행했던 역할에 대하여 면밀하게 탐구한다. 개인적으로 놀..
빈센트 반 고흐 | 인고 발터 | 마로니에북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삶과 작품 뜨거운 태양 아래 온갖 것들로 이글대던 여름의 한가운데,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내가 있다. 꿈결처럼 다가오는 작품을 바라보며 느꼈던 벅찬 감동이 십수 년의 시간을 거슬러 단박에 되살아난 것이다. 보색 대비되는 강렬한 색채와 소용돌이치듯 꿈틀대는 붓놀림이 이룩한 경이의 세계 앞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실로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한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던 것 역시 기억난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지독한 혼란을 마주해야 했던 그의 비극적 삶을 짐작하고 있는 연유였다. ■ Wheatfield with Crows Vincent van Gogh (1853 - 1890), Auvers-sur-Oise, July 1890 oil o..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 무라세 다케시 | 모모 열차 탈선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순식간에 잃은 사람들 그 애절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 가마쿠라시에 봄 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던 그날, 급행열차 한 대가 선로를 벗어났다. - p.7 절벽 아래로 떨어진 열차는 한순간에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된 유가족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끌어안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두 달 가량이 흐르고, 사고로 잃은 소중한 이와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채 이별의 한 마디조차 나누지 못한 남겨진 이들의 황망함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심정으로 읽는 내내 이 소설을 마주했다. 더욱이 지치고 벅찬 현실 앞에서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고 외려 소홀하고 외면..
100 인생 그림책 | 하이케 팔러 | 사계절 0세에서 100세까지 100장면으로 보는 인생의 맛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갈 모두의 보편적 인생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 자연스레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가만히 살아온 날들을 떠올리며 앞으로 펼쳐질 나날에 대하여 상상해본다. 그 짧지만 깊었던 순간이 정말이지 소중했다. 『100 인생 그림책』을 넘기다가 인생의 중반인 50에 이르렀을 때, 어린 딸은 제 엄마의 손을 잡고 그 엄마는 나이가 지긋해져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엄마 손을 꼭 잡고 셋이 함께 나아간다. 그리고 쓰여 있다. “인생에는 두 가지 큰 힘이 있어. 누군가 너를 끌어주고 있니? 누군가 너를 밀어주고 있니?”라고. 다가올 나의 오십에는 곁에서 나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이 두 가지 큰 힘만 있어도 충분히 순항 ..
워터멜론 슈가에서 | 리처드 브라우티건 | 비채 일곱 가지 태양이 뜨는 마을에서 펼쳐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마을의 모든 것은 워터멜론 슈가에서 시작된다. 태양 아래 날마다 서로 다른 일곱 가지 빛을 발하며 반짝이는 워터멜론 즙을 짜내 불에 졸여 얻어 낸 슈가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편히 쉴 수 있는 오두막,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들판… 까지도.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이 모든 행위는 단순한 노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착실하게 삶을 일궈나간다는. 그들이 살고 있는 워터멜론 슈가로 둘러싸인 마을, 아이디아뜨(iDEATH)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다. 지극히 유토피아적이면서도 자연친화적 면모가 도드라진다. 그러나 더없이 이상적이고도 평화로운 배경이 무색하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사랑을 하고 배신의..
용의자의 야간열차 | 다와다 요코 | 문학동네 결락과 불협화음으로 문학의 틀을 깨고 언어와 언어 사이의 경계를 걷는 작가 다와다 요코의 대표작 당신은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어둠을 가르며 어디론가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들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건네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며 부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한 것은 없다. 오직 달리는 야간열차에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이다. 익숙한 듯 낯선 세계를 향한 이 여정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가 아닌 ‘당신’이 돼 버린 순간 이 여행은 당신 스스로를 목적지로 한, 그렇기에 - 당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한 - 좀처럼 그 끝에 다다를 수 없는 무한의 여정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동시에 한 걸음 ..
애쓰지 않아도 | 최은영 | 마음산책 애쓰지 않아도 마음을 나눠줄 수밖에 없던 시절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마음에 고이 품은 무언가를 위하여 비로소 성립 가능하던 ‘애쓰다’는 말이 언제부턴가 생존을 위한 안간힘으로 변질됐음을 자각한다. 이건 정말이지, 무섭고도 지독한 일이라고 의식하면서. 그래서 더 애달픈 마음으로 이 짧은 소설들을 마주했다. 정녕 애쓰지 않아도 되는 걸까, 되뇌면서. 『애쓰지 않아도』에는 표제작을 비롯하여 열네 편의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작가 최은영의 시선이 머문 자리에서 맺어진 이야기들이기에 자연히 그녀가 바라본 세계를 응시하게 된다. 그곳에는 쉬이 상처받고, 오래도록 마음 안에서 무언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세계의 연약한 존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