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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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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들 순간들 | 배수아 | 문학동네 비밀과 매혹, 기다림과 망각, 글쓰기와 언어, 그리고 한 권의 책 열네 편의 글 안에서 나는 열네 번의 산책에 동행하고 있었다. 내디딘 걸음걸음은 그 자체로 — 화자와 베를린 서가의 주인, 그리고 나를 포함한 — 우리의 순간들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느꼈다. 더욱이 혼자 있는 중에도 틈만 나면 머릿속으로 숲 속 울타리에 둘러싸인 정원 오두막을 떠올리곤 했는데, 왜냐하면 그 공간에 머물렀기에 비로소 가능해진 모든 순간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까닭이었다. 문장 따라 산책길에 나선 나 역시, 그 정원 오두막에 속해 있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도 근사한 경험이었다. 알지 못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고 잊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것들을 각성하게 만드는 한편 그 안에서..
헌책 낙서 수집광 | 윤성근 | 이야기장수 시간을 끌어안은 헌책에서 쏟아져나온 낙서와 작동사니의 박물관 기본적으로 타인의 흔적이란 그리 달갑지 않다. 기왕이면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러나 수수께끼 같은 낙서나 감상적 느낌을 적은 책 속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숨겨진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긴 어려우리라. 나 역시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 일전에 흥미롭게 읽은 『헌책방 기담 수집가』의 저자를 기억하고 있던 까닭에 과연 그 다운 책이 새로이 출간됐다는 인상과 함께 — 헌책에 담긴 각종 사연들이 몹시도 궁금해졌으니.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 중인 저자는 자신을 가리켜 — 책 제목이기도 한데 — ‘헌책 낙서 수집광’이라 칭한다. 다량의 헌책들 사이에서 종일 씨름하다 보면 여기저기 눈에 띄는 게 과거의 ..
영리 | 누마타 신스케 | 해냄 상실의 시대, 인간 앞에 펼쳐진 대재앙의 그늘 곤노는 동성 애인과 헤어지고 발령받아 온 이와테 현에서 직장 동료로 만난 히아사와 − 청주를 좋아하고 낚시를 즐긴다는 공통분모로 − 차츰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히아사가 아무런 말없이 이직한 사실에 서운함을 느끼던 중, 대지진에 이은 쓰나미가 일어나고 그가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그의 행적은 지금껏 자신이 알아 온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에 마주한 진실 앞에서 곤노는 홀연히 오이데 강으로 향한다. 올해 들어 첫 낚시였고 첫 입질에서 낚은 물고기는 뜻밖에도 무지개송어. 그러고는 “한참 강가에 우뚝 서 있”(p.91)는다. 그때에 곤노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대한 파도 앞에 서 ..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 레이먼드 카버 | 문학동네 한밤에 찾아온 불안과 잠에 겨운 새벽의 이야기, 우리가 견디는 매일을 끌어안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 일상 속 미묘한 순간들이 있다. 떠밀려온 어떤 상황에 있는 자신을 얼떨한 채 자각하면서도 외려 이 찰나를 빌어 감춰 온 지난날의 기억, 그때의 감정을 발현시키고 마는 순간 말이다. 누군가는 폭발적으로 쏟아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무마시키고자 애써 마음을 억누를 것이다. “운명은 없다”(p.159)며 속절없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수도 있으리라. 모르는 체 외면할 수도 있고 “온종일 띄엄띄엄 생각”(p.126)할 수도, 아예 사로잡혀 어떻게든 이 일을 정리하고자 애쓸 수도 있겠다. 나는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매일이고, 삶의 민낯이라 여긴다. 레이먼드 카버의 열한 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모두 우리가 살아..
경성기담 | 전봉관 | 살림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근대 조선에서 벌어졌던 살인 사건과 스캔들을 파헤친다. 사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든 그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과 스캔들은 늘 있어 왔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근대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아픔으로 점철된 시기였기에 『경성기담』에서 다뤄지고 있는 이야기들이 이와 같은 특수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것만이 더해졌을 뿐. 그런 까닭에 이 책에 담긴 4건의 살인 사건과 6인의 스캔들은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과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 무엇보다 개인의 사적인 면모를 들여다보게 하기에 시선이 모아진다. 이는 “사람 냄새 나는 인문학”(p.346)을 추구하고 싶었다고 밝힌 저자의 바람을 담은 시도이자 결과물일 것이다. 이를 ..
환희의 인간 | 크리스티앙 보뱅 | 1984Books 일상을 시로 바꾸는 데 있어서 보뱅을 따라올 자는 없다 “환희의 인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보뱅이 하고 싶었던 말, 그것은 말하자면 서문의 맨 처음에서 밝힌 “파랑에 대한 이야기”(p.17)일 것인데, 유리구슬처럼 맑고 투명한 문장 앞에서 나는 그 아름다움에 홀려 한참을 서성였다. 하지만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보뱅이 뜻한 대로 문장들을 아주 천천히 좇아온 것일 뿐. 말하자면 유려한 문장이 나를 강하게 매혹하는 한편 계속적으로 주의를 환기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세상의 온갖 미미한 것들, 하지만 쉬이 흘려보내선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아우성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그의 문장이 조심스레 다루어지지 않으면 쉬이 깨져버리고 말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았다고 하면 조금 거창할까. ..
전쟁일기 ::우크라이나의 눈물 | 올가 그레벤니크 | 이야기장수 이것은 수백만 평범한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순간에 생활터전을 잃고 피난에 나서야만 했던 작가는 고백한다. “내 인생 35년을 모두 버리는 데 고작 10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p.86)고. 그렇게 한순간에 일상의 고요를 깬 폭격은 우크라이나인들을 공포와 절망에 몰아넣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아이가 있는 작가는 피치 못한 상황을 대비해 자신의 아이들 팔에 이름과 생년월일, 전화번호를 적고 역시 혹여 모를 불상사를 생각하며 자신의 팔에도 적어 둔다. 또한 연로한 나이 때문에 피난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조부모와 그들을 위해 남겠다는 엄마, 또한 계엄령으로 국경 밖으로 피난할 수 없는 남편과의 이별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때의 심정이란 어땠을까, 감히 헤아리기 조차 힘든 절..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 문학과지성사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사랑을 생각한다. 만남과 이별 사이, 삶의 희열이 충만했던 그 여름을 생각한다. 머지않아 폭풍이 밀려오고 장대비가 쏟아졌던 그 여름을 생각한다. 그 계절, 한복판의 나를 생각한다. 그 여름의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p.117 「그 여름의 끝」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지음/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