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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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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 | 전봉관 | 살림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근대 조선에서 벌어졌던 살인 사건과 스캔들을 파헤친다. 사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든 그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과 스캔들은 늘 있어 왔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근대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아픔으로 점철된 시기였기에 『경성기담』에서 다뤄지고 있는 이야기들이 이와 같은 특수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것만이 더해졌을 뿐. 그런 까닭에 이 책에 담긴 4건의 살인 사건과 6인의 스캔들은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과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 무엇보다 개인의 사적인 면모를 들여다보게 하기에 시선이 모아진다. 이는 “사람 냄새 나는 인문학”(p.346)을 추구하고 싶었다고 밝힌 저자의 바람을 담은 시도이자 결과물일 것이다. 이를 ..
환희의 인간 | 크리스티앙 보뱅 | 1984Books 일상을 시로 바꾸는 데 있어서 보뱅을 따라올 자는 없다 “환희의 인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보뱅이 하고 싶었던 말, 그것은 말하자면 서문의 맨 처음에서 밝힌 “파랑에 대한 이야기”(p.17)일 것인데, 유리구슬처럼 맑고 투명한 문장 앞에서 나는 그 아름다움에 홀려 한참을 서성였다. 하지만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보뱅이 뜻한 대로 문장들을 아주 천천히 좇아온 것일 뿐. 말하자면 유려한 문장이 나를 강하게 매혹하는 한편 계속적으로 주의를 환기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세상의 온갖 미미한 것들, 하지만 쉬이 흘려보내선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아우성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그의 문장이 조심스레 다루어지지 않으면 쉬이 깨져버리고 말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았다고 하면 조금 거창할까. ..
전쟁일기 ::우크라이나의 눈물 | 올가 그레벤니크 | 이야기장수 이것은 수백만 평범한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순간에 생활터전을 잃고 피난에 나서야만 했던 작가는 고백한다. “내 인생 35년을 모두 버리는 데 고작 10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p.86)고. 그렇게 한순간에 일상의 고요를 깬 폭격은 우크라이나인들을 공포와 절망에 몰아넣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아이가 있는 작가는 피치 못한 상황을 대비해 자신의 아이들 팔에 이름과 생년월일, 전화번호를 적고 역시 혹여 모를 불상사를 생각하며 자신의 팔에도 적어 둔다. 또한 연로한 나이 때문에 피난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조부모와 그들을 위해 남겠다는 엄마, 또한 계엄령으로 국경 밖으로 피난할 수 없는 남편과의 이별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때의 심정이란 어땠을까, 감히 헤아리기 조차 힘든 절..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 문학과지성사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사랑을 생각한다. 만남과 이별 사이, 삶의 희열이 충만했던 그 여름을 생각한다. 머지않아 폭풍이 밀려오고 장대비가 쏟아졌던 그 여름을 생각한다. 그 계절, 한복판의 나를 생각한다. 그 여름의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p.117 「그 여름의 끝」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지음/문학과지성사
식민지의 식탁 | 박현수 | 이숲 식민지시대 식탁의 배경과 역사 소설을 통해 본 여러 가지 음식의 풍경들 음식을 통해 삶과 시대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여간 흥미롭지 않다. 그것은 음식 자체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지만, 경험하지 못한 시대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어쩌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그 시절 사람들이 즐기던 음식과 그 음식을 내어주던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아우르던 공간들을 활자로 나마 생생하게 엿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무엇보다 “먹는다는 행위의 온전한 의미를 물으려 했다”(p.5)는 저자의 의도에 시선이 모아졌는데, 식민지라는 엄혹한 시대에도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은 계속 됐고 그 불가피한 지배국 하에서 새로이 유입돼 정착된 식문화는 오늘날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관심이 더 갔..
눈 | 막상스 페르민 | 난다 한 권의 소설이면서 한 편의 시가 되는 이야기 아직 누구도 밟은 일 없는 소복하게 눈 쌓인 너른 들판을 상상한다. 온통 눈부신 흰빛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그곳을 지나야 한다면, “태어나, 연기하다, 죽는 사람들”(p.122)의 내딛는 걸음걸음은 한없이 조심스러워질 테다. 어쩌면 자신이 남길 발자국을 기대하며 성큼성큼 나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를 쓰는 남자, 유코는 눈 속에 숨어 있을 줄을 찾아 그 위를 아주 신중하고도 대담한 걸음으로 내딛으리라. “삶의 줄 위에서 균형을 잡”(p.122)아야 하는 곡예사의 운명을 타고난 연유다. 그는 삶의 곡예사이자 언어의 곡예사가 되기 위한 걸음을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선생 소세키는 시인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그렇게 좇아야 한다고 일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 샘터사 당신이 지금 힘겹게 살고 있는 하루하루가 바로 내일을 살아갈 기적이 된다!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p.239) 맺었던 장영희 교수의 마지막 문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새봄을 기다린다’는 말을 여러 번 읊조리기도 하면서. 그것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품게 된 안타까움과 고마움의 교차된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녀의 일을 진즉 알고 있는 데다가, 힘든 와중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글을 남기고 갔기에 말이다. 그 안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문장,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인간의 패기도, 열정도, 용기도 아니고 인간의 ‘선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p.220, 221) 적고 있었던 걸 다시금 떠올려 본다. 그녀는 앞장서 그런..
오리엔탈 특급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 황금가지 전 세계 미스터리의 역사를 재창조한 추리 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를 대표하는 작품만을 모은 에디터스 초이스 폭설 속에 고립된 기차 안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탐정 푸아로는 시체에서 발견된 상처와 승객들의 심문으로 범인을 밝히고자 몰두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또 다른 대표작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마찬가지로 - 각기 기차와 별장이라는 - 밀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추리 소설이다. 다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경우 연쇄 살인 속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통해 충격과 공포에 빠진 사람들의 심리를 크게 부각한 반면, 『오리엔탈 특급 살인』은 공동의 적을 향한 연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바라는 바를 이뤄내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함으로써 완벽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