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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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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옷장 | 아니 에르노 | 1984Books 살아낸 글, 살아서 건너오는 글, 그것이 바로 아니 에르노의 문학이 가진 힘 “나는 죽고 싶지 않다.”(p. 229) 했던 목소리를 되뇌며 한참을 사로잡혀 있었다. 토해내듯 숨 가쁘게 이어지는 문장 안에 드리운 드니즈 르쉬르 혹은 아니 에르노의 삶을 향한 결기를 마주했다는 안도감과 이 악물고 버텨온 지난날의 상처가 그럼에도 결코 말끔하게 아물지 못하리라는 슬픔이 일시에 밀려온 까닭이었으리라.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오직 그것만을 위한 글쓰기였기에 삶과 문학, 그 사이 경계마저 무용한 경이로운 진정성을 보여 준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빅토르 위고나 페기처럼 교과 과정에 있는 작가를 공부해 볼까. 구역질이 난다. 그 안에는 나를 위한 것, 내 상황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
알코올과 작가들 | 그렉 클라크∙몬티 보챔프 | 을유문화사 위대한 작가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음주열전 술과 문학에 관한 가장 지적인 탐험 여덟 종의 술 — 와인, 맥주, 위스키, 진, 보드카, 압생트, 메스칼∙데킬라, 럼 — 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 술을 즐기던 작가와 예술가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덧붙이고 있다. 그들은 술을 통해 풍부한 예술적 영감을 얻기도 하는 한편, 과도한 음주로 신체적∙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도 했다. 사실 그 과정은 술을 마시는 우리 각자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은 까닭에 술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보다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할 것이다. 더욱이 술들이 지닌 저마다의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 또한 적지 않다. 술과 문학을 애정한다면 이 한 권의 책이 그 어느 안주 못지않으리란 생각을 해보며. (잭) 런던은 술에 취한 자신의 상태를 다음처럼 화려하게 적었..
연인 | 마르그리트 뒤라스 | 민음사 베트남에서의 가난한 어린 시절과 중국인 남자와의 광기 서린 사랑 그 아련한 이미지들을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로 되살려 낸 자전적 소설 무더위만큼이나 뜨거운 욕망에 사로잡혔던 프랑스인 소녀와 중국인 남자의 사랑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관능적 문장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일찍이 소녀는 남성용 모자를 쓴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며 퍽 마음에 들어 하는 한편 어딘가 달라진 스스로의 일면을 알아챈다. 그러고는 이내 예감한다. “밖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모든 시선에 자신을 드러내고, 도시와 도시를, 길과 길을 싸돌아다니며 자신을 굴리는, 욕망에 자신을 맡기는 여자”(p.20)가 되리라는 것을. 이후 소녀는 메콩 강을 건너 기숙학교로 돌아가기 위한 나룻배에서 리무진을 탄 중국인 남자를 만난다. 하..
어느 강아지의 하루 | 월터 이매뉴얼(글)·세실 앨딘(그림) | 책이있는마을 강아지의 익살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요절복통 하루 이야기 늦은 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검은 눈망울을 바라볼 적이면, 이따금 나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궁금해하곤 했다. 오늘 너의 하루는 어땠는지. 동화 『어느 강아지의 하루』는 제목 그대로 어느 강아지의 하루 일과다. 몰래 먹은 음식에 탈이 나기도 하고, 동거 중인 고양이와 신경전을 벌이며 복수를 다짐하기도 하는 한편 반려인에 혼이 나 도망하기도, 칭찬에 우쭐해하기도 하는 일상을 강아지의 시선을 통해 그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강아지가 느낀 솔직한 감정들, 그 생동감 넘치는 표현 안에서 자연스레 미소 짓게 되는데, 하루 일과를 마친 강아지는 “이렇게 해서 따분한 하루가 저물었다”(p.127)고 생각한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음에도 정작 자신은 따분했다니!..
작별들 순간들 | 배수아 | 문학동네 비밀과 매혹, 기다림과 망각, 글쓰기와 언어, 그리고 한 권의 책 열네 편의 글 안에서 나는 열네 번의 산책에 동행하고 있었다. 내디딘 걸음걸음은 그 자체로 — 화자와 베를린 서가의 주인, 그리고 나를 포함한 — 우리의 순간들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느꼈다. 더욱이 혼자 있는 중에도 틈만 나면 머릿속으로 숲 속 울타리에 둘러싸인 정원 오두막을 떠올리곤 했는데, 왜냐하면 그 공간에 머물렀기에 비로소 가능해진 모든 순간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까닭이었다. 문장 따라 산책길에 나선 나 역시, 그 정원 오두막에 속해 있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도 근사한 경험이었다. 알지 못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고 잊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것들을 각성하게 만드는 한편 그 안에서..
헌책 낙서 수집광 | 윤성근 | 이야기장수 시간을 끌어안은 헌책에서 쏟아져나온 낙서와 작동사니의 박물관 기본적으로 타인의 흔적이란 그리 달갑지 않다. 기왕이면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러나 수수께끼 같은 낙서나 감상적 느낌을 적은 책 속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숨겨진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긴 어려우리라. 나 역시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 일전에 흥미롭게 읽은 『헌책방 기담 수집가』의 저자를 기억하고 있던 까닭에 과연 그 다운 책이 새로이 출간됐다는 인상과 함께 — 헌책에 담긴 각종 사연들이 몹시도 궁금해졌으니.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 중인 저자는 자신을 가리켜 — 책 제목이기도 한데 — ‘헌책 낙서 수집광’이라 칭한다. 다량의 헌책들 사이에서 종일 씨름하다 보면 여기저기 눈에 띄는 게 과거의 ..
영리 | 누마타 신스케 | 해냄 상실의 시대, 인간 앞에 펼쳐진 대재앙의 그늘 곤노는 동성 애인과 헤어지고 발령받아 온 이와테 현에서 직장 동료로 만난 히아사와 − 청주를 좋아하고 낚시를 즐긴다는 공통분모로 − 차츰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히아사가 아무런 말없이 이직한 사실에 서운함을 느끼던 중, 대지진에 이은 쓰나미가 일어나고 그가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그의 행적은 지금껏 자신이 알아 온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에 마주한 진실 앞에서 곤노는 홀연히 오이데 강으로 향한다. 올해 들어 첫 낚시였고 첫 입질에서 낚은 물고기는 뜻밖에도 무지개송어. 그러고는 “한참 강가에 우뚝 서 있”(p.91)는다. 그때에 곤노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대한 파도 앞에 서 ..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 레이먼드 카버 | 문학동네 한밤에 찾아온 불안과 잠에 겨운 새벽의 이야기, 우리가 견디는 매일을 끌어안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 일상 속 미묘한 순간들이 있다. 떠밀려온 어떤 상황에 있는 자신을 얼떨한 채 자각하면서도 외려 이 찰나를 빌어 감춰 온 지난날의 기억, 그때의 감정을 발현시키고 마는 순간 말이다. 누군가는 폭발적으로 쏟아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무마시키고자 애써 마음을 억누를 것이다. “운명은 없다”(p.159)며 속절없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수도 있으리라. 모르는 체 외면할 수도 있고 “온종일 띄엄띄엄 생각”(p.126)할 수도, 아예 사로잡혀 어떻게든 이 일을 정리하고자 애쓸 수도 있겠다. 나는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매일이고, 삶의 민낯이라 여긴다. 레이먼드 카버의 열한 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모두 우리가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