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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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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느티나무 –강신재 소설선 | 강신재 | 문학과지성사 강신재 소설선 1950, 60년대 한국의 대표적 여성작가 강신재의 중단편집으로 표제작인 「젊은 느티나무」를 비롯 총 열 편이 실려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처해있는 난처한 삶 속에서 제 나름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지만, 속 시원한 결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들 자신의 나약함 혹은 어리숙함이라기 보다는 가정과 사회 안에서 여성이라는 존재에게 부여되고 허락된 역할의 시대적 한계에서 기인한다고 이해해야 할 성싶다. 다만 그럼에도 그들이 마냥 제 처지를 자조하고 체념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희미한 희망을 본 듯도 하지만 말이다. 「안개」에서 성혜는 남편의 눈을 피해 쓴 소설이 유명 잡지에 실리자 기뻐하면서도 불쾌해 할 남편을 떠올리며 안절부절못했고, 「해방촌 가는 길」의 기애는..
행복이 이렇게 사소해도 되는가 | 강진이 | 수오서재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 삶을 수놓은 행복과 감사를 채집하는 그림일기 안온하게 감싸 주는 이 기분은 무얼까. 강진이 작가의 글과 그림을 만나보면서 내내 그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일상 곳곳에 숨어 있는 행복을 알아채고 감사할 줄 아는 이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그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정성껏 그리고 쓴 그림일기 안에서 나 역시도 평범한 일상 속 작은 행복을 새삼 일깨우며 따스함을 양껏 느낄 수 있었다. “오늘 하루 이 모든 아름다움에 감사해(p.211)”야지. 눈부신 오후에 누리는 여유로움에 감사하다. 잠깐의 산책도 마지막인 듯 최선을 다해 즐기는 강아지 달님이에게, 서로 믿고 의지하며 무럭무럭 힘을 내 자라는 빨간 담쟁이에게, 풀 한 포기를 사랑으로 바라보..
아우라 | 카를로스 푸엔테스 | 민음사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한 여인의 집요한 욕망 독특한 화법과 어둡고 기괴한 묘사가 돋보이는 신비로운 고딕소설 펠리페 몬테로는 젊은 사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구시가지의 한 낡고 어두운 저택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백발의 늙은 콘수엘로 부인은 오래전 죽은 남편 요렌테 장군의 비망록 출판을 위한 원고 정리를 요청하는데, 그때 부인의 조카 아우라가 등장하고 그녀의 두 눈동자에 매료돼 이끌리듯 일을 수락한다. 그러나 이후 눈으로 확인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지며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 기묘한 일들은 현실과 환상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상황 속에서 한층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는 그들 각자가 자신의 욕망에 취해 보았던 환영과도 연결되는 까닭이다. 펠리페는 여인의 아..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 이제니 | 문학과지성사 무한을 보고 싶다 분주했다. 여기서 출발했지만 저기서 그칠 것이란 생각을 조금씩 지워가면서 계속적으로 나아가야 했으므로. 내심 기대했던 걸까. “빛보다 빠른 오늘의 너에게”(p.7)라는 그 말을. 헤매었다. 믿어 의심치 않던 것마저 나의 의식을 흔들었기에. 그 흔들림 안에서 기린과 그린, 가지와 앵무, 달과 부엉이, 꽃과 재, 나무의 나무…… 끝없이 계속되는 낱말들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김질해 본다. 정녕 알고 있다고 여겼던 그 뜻이 맞느냐고. 점진적으로 속도가 붙는 리듬 안에서 그렇게 자문하며 나는 향해가고 있었다. “무한을 보고 싶다”던 시인의 바람을 곁눈질하며.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이미상 외 | 문학동네 # 01.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이미상 오래전 겨울날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이 함께했던 짧은 여행은 각자의 뇌리 속에서 저마다 잊히지 않을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아가 어느 한순간을 너머 통으로 봉인돼 기억의 방에 자리할지도 모를 일이다. 가령 무경이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하고서 “고모의 그 일을, 내가 했어요.”(p.38) 했을 때 고모는 “너는 내 딸이구나.”(p.38) 했고, 그 순간 난생 처음 존댓말로 목경이 “고모, 나 열나요.”(p.38) 했던 순간이 그렇다. 무경의 ‘한 방’에 대한 목경의 본능적 위기의식이 표출되던 때…. 훗날 고모의 상중 들른 카페에서 목경이 소설에 대해 말하고 있는 여자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그 겨울을 자연스레 떠올렸으리라 짐작해본다..
개인적 체험 | 오에 겐자부로 | 을유문화사 출구 없는 현실에 놓인 현대인에게 재생의 희망은 있는지 물음을 던지는 수작(秀作) 정녕 희망은 있는 걸까. 버드는 절망의 순간 희망을 물었다. “그런, 뇌 헤르니아의 갓난아기가 정상적으로 자랄 희망이 있는 건가요?”(p.38) 실은 스스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섣불리 장담해 줄 수 없으리란 것을. 그럼에도 그 순간 그는 희망을 물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그 지점에서 이 개인적 체험이 한 존재에게만 한정된 고통이 아닌 삶 속에서 저마다 어떤 식으로든 마주하기 마련인, 그리하여 — 확실한 절망 아닌 — 불확실한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공동의 체험으로 확장됨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비로소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아기를 살리고자 하는 대..
빈 옷장 | 아니 에르노 | 1984Books 살아낸 글, 살아서 건너오는 글, 그것이 바로 아니 에르노의 문학이 가진 힘 “나는 죽고 싶지 않다.”(p. 229) 했던 목소리를 되뇌며 한참을 사로잡혀 있었다. 토해내듯 숨 가쁘게 이어지는 문장 안에 드리운 드니즈 르쉬르 혹은 아니 에르노의 삶을 향한 결기를 마주했다는 안도감과 이 악물고 버텨온 지난날의 상처가 그럼에도 결코 말끔하게 아물지 못하리라는 슬픔이 일시에 밀려온 까닭이었으리라.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오직 그것만을 위한 글쓰기였기에 삶과 문학, 그 사이 경계마저 무용한 경이로운 진정성을 보여 준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빅토르 위고나 페기처럼 교과 과정에 있는 작가를 공부해 볼까. 구역질이 난다. 그 안에는 나를 위한 것, 내 상황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
알코올과 작가들 | 그렉 클라크∙몬티 보챔프 | 을유문화사 위대한 작가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음주열전 술과 문학에 관한 가장 지적인 탐험 여덟 종의 술 — 와인, 맥주, 위스키, 진, 보드카, 압생트, 메스칼∙데킬라, 럼 — 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 술을 즐기던 작가와 예술가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덧붙이고 있다. 그들은 술을 통해 풍부한 예술적 영감을 얻기도 하는 한편, 과도한 음주로 신체적∙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도 했다. 사실 그 과정은 술을 마시는 우리 각자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은 까닭에 술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보다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할 것이다. 더욱이 술들이 지닌 저마다의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 또한 적지 않다. 술과 문학을 애정한다면 이 한 권의 책이 그 어느 안주 못지않으리란 생각을 해보며. (잭) 런던은 술에 취한 자신의 상태를 다음처럼 화려하게 적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