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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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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불안하지만 빛나던 시절 청춘, 예술 그리고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들 문득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p.21)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말하자면 상실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제 안의 의지의 산물이기도 했고 그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기도 했다. 또한 일순 벌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일어났음을 후일 자각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사라진 것들을 곱씹으며 나름의 방식으로 상실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때때로 깊은 슬픔과 고통을 수반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은 — 일말의 후회와 자책, 아쉬움을 담고 있기는 했으나 —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희석됐다. 다만 그 가운데서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 애써 지난날의 무언가를 돌이켜 보려..
에이미와 이저벨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택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어려움에 관해 빛나는 고결함과 유머로 써내려간 소설 딸 에이미와 엄마 이저벨은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 관계에는 미묘한 어긋남이 자리한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친밀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도무지 가 닿을 수 없는 간극이 모녀가 보낸 무더운 계절 안에서 한층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질식할 듯 뿜어내는, 그럼에도 이미 익숙해져 버린 유황 냄새에 장악당한 그녀들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만큼이나 끈질기고도 지독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바보 같은 자신들의 삶이 고단하고 구역질났지만 서로 찰싹 들러붙어 있”(p.313)을 수밖에 없다고 한 이 관계에 대하여 자연스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비단 모녀 관계의 일만은 아니..
미겔 스트리트 | V.S. 나이폴 | 민음사 좌절과 광기로 얼룩진 식민지 사회 미겔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비극적 초상을 한 소년의 눈을 통해 희극적 터치로 그려 낸 연작 소설 트리니다드 섬의 수도 포트오브스페인의 빈민굴 미겔 스트리트. 여기 살고 있는 소년 ‘나’는 자신의 눈에 비친 거리의 사람들을 열여섯 편의 단편을 통해 그리고 있다. 그들 대다수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로 여러 직업을 전전하거나 아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거하게 술을 마시고 도박을 즐기며 아내와 자식을 구타하기도 한다. 또한 불륜을 저지르고 도둑질을 일삼으며 경찰에 연행되는 일도 빈번하다. 소년은 “그러나 거기서 살고 있던 우리는 그 거리를 하나의 세계로 여기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각기 특유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p.101)고 회고..
로마 이야기 | 줌파 라히리 | 마음산책 "몇 번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단테 알리기에리」의 ‘나’는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광장 위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에 친구 중 하나가 로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참 엿 같은 도시야.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p.279)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쓴 두 번째 소설 『로마 이야기』를 관통하는 문장이자, 그녀의 진심이 물씬 담긴 표현이라 여기며 이 책을 덮었던 것부터 적어둬야겠다. 정말 아름답지만 그에 상응하는 증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애증이야말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솔직한 감정 중의 하나일 것이므로 한층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를 떠올리면, 인도계 이민 2세대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했고 이후 이탈리아 로마로 이..
내 이름은 루시 바턴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 모든 생(生)은 감동이다! 소설가가 된 ‘나’(루시 바턴)는 자신이 걸어온 삶을 돌이켜본다. 그 시작은 1980년대 중반, 9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욕에서 가정을 꾸린 때였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남편을 대신해 상당 기간 연락을 하고 있지 않던 엄마의 병간호를 받아야 했던 상황이었다. 자연히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 안에서 그 시절 가족들과 앰개시라는 작은 시골 마을 그리고 이웃들… 소소한 행복이 있기도 했지만 지독히 벗어나고 싶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알알이 살아난다. “지금은 내 인생도 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여기면서도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
어느 강아지의 하루 | 월터 이매뉴얼(글)·세실 앨딘(그림) | 책이있는마을 강아지의 익살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요절복통 하루 이야기 늦은 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검은 눈망울을 바라볼 적이면, 이따금 나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궁금해하곤 했다. 오늘 너의 하루는 어땠는지. 동화 『어느 강아지의 하루』는 제목 그대로 어느 강아지의 하루 일과다. 몰래 먹은 음식에 탈이 나기도 하고, 동거 중인 고양이와 신경전을 벌이며 복수를 다짐하기도 하는 한편 반려인에 혼이 나 도망하기도, 칭찬에 우쭐해하기도 하는 일상을 강아지의 시선을 통해 그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강아지가 느낀 솔직한 감정들, 그 생동감 넘치는 표현 안에서 자연스레 미소 짓게 되는데, 하루 일과를 마친 강아지는 “이렇게 해서 따분한 하루가 저물었다”(p.127)고 생각한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음에도 정작 자신은 따분했다니!..
오리엔탈 특급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 황금가지 전 세계 미스터리의 역사를 재창조한 추리 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를 대표하는 작품만을 모은 에디터스 초이스 폭설 속에 고립된 기차 안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탐정 푸아로는 시체에서 발견된 상처와 승객들의 심문으로 범인을 밝히고자 몰두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또 다른 대표작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마찬가지로 - 각기 기차와 별장이라는 - 밀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추리 소설이다. 다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경우 연쇄 살인 속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통해 충격과 공포에 빠진 사람들의 심리를 크게 부각한 반면, 『오리엔탈 특급 살인』은 공동의 적을 향한 연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바라는 바를 이뤄내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함으로써 완벽한 ..
여우 8 | 조지 손더스 | 문학동네 사라져가는 숲과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말을 배운 여우가 전하는 위트 있는 경고! “좀 차캐지려고 노력카새요.”라는 여우 8의 충고에 잠시 멈칫했다. 좀 착해지라니…… 그렇다. 당혹스럽지만, 확실히 우리는 좀 착해질 필요가 있지 않은가. 얼마 전 한 tv 랭킹 쇼에서 인간이 배출하는 음식물 탓에 일 년 내내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된 야생 흑곰들이 겨울잠을 자지 않게 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에 기후 변화가 더해져 한겨울에도 체온 유지가 용이하게 돼 곰들의 동면 거부를 부추기고 있다고도 했다. 이에 마을로 내려온 곰들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 사람들이 늘어나자 미국 캘리포니아 당국에서는 이들의 안락사를 고려하고 있는 실정이라고도 덧붙였다. 원인 제공자는 명백히 인간임에도 곰에게 책임 전가를 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