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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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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 민음사 고루하고 위선적인 권위에 희생된 순수한 소년의 비극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짓밟는 제도와 교육에 대한 비판 소년 한스 기벤라트는 총명했고, 그런 까닭에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재능 있는 아이라면 의례히 나아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을 향해 내디뎠다. 그것은 곧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는 일이었는데, 입학의 기쁨과 밝은 장래에 대한 설렘도 잠시, 신학교 생활은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온 지난날의 삶을 전복시킨다. 결국 신경쇠약 증세로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더는 주위에서 격려하던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냉엄한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그 파국의 여정을 좇으며 수레바퀴 아래서 있던 젊은 영혼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물론 어느 누구도 한스가 잘못되기를 ..
두부 | 박완서 | 창비 박완서 산문집 스물세 편의 글을 모두 읽고서 책 정보를 살펴보니 초판 시기는 2002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하고도 일 년 전이 되고, 여기 엮인 산문들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95년부터 쓰인 것을 엮었으니 삼십 년을 향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글을 읽는 나로서는 강산도 세 번 바뀔 그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문장 안에서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박완서 작가를 마주했다. 그것은 곧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 그 끝에는 — 단박에 우리의 눈을 홀리는 빛나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 저 밑의 하찮고 소박해서 쉬이 업신여겨지거나 지나칠 법한 것에 진득하게 머무르며 그 작은 것들에 목소리를 보태는 따스함이지 않았을까. 더욱이 삶의 희로애락, 그 모든 순간을 통과..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 시공사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나 감정 따위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골몰하다가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이 마음을 더없이 잘 설명할 단어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품고서 말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에서 소개하고 있는 단어들은 낯설지만 적당한 단어를 찾아 헤매던 우리의 마음을 번뜩이게 해 소중하게 다가온다. 나아가 각기 단어들이 품고 있는 의미가 언어의 벽을 넘어 저마다의 가슴속에 슬며시 와닿는 순간을 고대하게도 만든다. 덕분에 마음을 표현하고 전할 수 있는 초면인 단어들과의 만남 안에서 신선한 즐거움을 느꼈다. 온 마음을 다하면 결과도 좋을 것입니다. ‘메라키’라는 개념은, 그리스인들의 사려 깊은 열정과 작은 것들에 감사하는 그들의 문화..
지극히 낮으신 | 크리스티앙 보뱅 | 1984BOOKS 하느님을 노래한 음유 시인이자 가난한 이들의 친구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충만한 사랑으로 이르기 위한 삶의 여정 가운데 기쁨을 소망한다. 그것이 곧 진리인 연유다. 높은 곳 아닌 낮은 곳에 있고, 충족 아닌 결핍에 있는 그 진리를 성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내려놓고 가난을 받아들인다.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난한 자이기를 꿈꾼다. 지극히 높으신 분만을 바라보던 두 눈과 마음의 상태는 지극히 낮으신 분으로 향하였다. 그러고는 세상사 모든 질문의 답변 역시 성서가 아닌 성서를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음을, “몸과 정신과 영혼으로 느끼는 것”(p.16)임을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증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으니..
나의 작은 산양 | 쉐타오(글)∙왕샤오샤오(그림) | 책과이음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숱한 날들의 기쁨과 아픔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기를 아기 산양과 함께한 나날에 대한 글과 그림이다. 그 유년의 따뜻했던 경험 안에서 아기 산양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순간이지만, 그걸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은 영원할 수 있”(p.53)다는 것에 대하여. 더불어 그때에 “아기 산양이 비로소 눈물을 멈추고 웃어 보였”(p.53)던 것 역시 떠올린다. 함께 울고 웃으며 마음을 나누었던 일은 이제 과거의 저편으로 흘러가 버렸지만, 서로에게 보인 진심만은 가슴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으리란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기도 하면서. 이 한 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안에서 만남과 이별, 사랑과 우정, 이를 통한 성장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들판의 기분은 좋..
너무나 많은 여름이 | 김연수 | 레제 이 삶은, 오직 꿈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오롯하게 우리의 삶이 된다 김연수 작가가 낭독회를 위하여 쓴 스무 편의 짧은 이야기를 엮은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 나는 “그들이 낮 동안 열심히 일해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밤의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것. 나는 그들이 모여서 듣는 내 이야기도 그런 것이 됐으면 싶었다”(p.297)는 소망을 담은 이야기들 안에서 우리가 걸어온 시간, 그리고 마주해 나가야 할 시간들에 대해 한참을 서성였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시기를 경험한 뒤의 일이기도 해서 보다 의미가 있었는데,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바로 그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p.298) 고도했던 작가의 말 역시 같은 맥락이었으리라 짐..
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 | 난다 유진목의 작은 여행 “여행자가 되어 분노를 잠재워볼 심산이었다”(p.207)는 저자는 “하필 하노이였던 것은 그곳의 모든 음식이 맛있기 때문이”(p.207)라고도 덧붙였다. 그 세 번의 여행을 통한 에세이 『슬픔을 아는 사람』은 저자가 혼자서 낯선 곳으로 떠나 심신을 달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조용하고도 격렬한 사투를 벌이고 있던 나날의 기록이다. 그런 까닭에 설렘과 즐거움 일색인 기존의 여행 에세이와는 아주 다른 결의 글들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행이란 모름지기 지친 일상을 잠시 세워 두고 삶의 활력을 되찾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기도 함을 떠올려 봤을 때, 어쩌면 이 편이 보다 현실적인 여행의 감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슬픔의 미덕을 아는 사람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세속적인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페이지2북스 400년 동안 사랑받은 인생의 고전 17세기 스페인 예수회 소속 수도자이자 철학자인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잠언집이다. 여기에는 『아주 세속적인 지혜』라는 제목에 더없이 부합하는 현실적인 조언들로 빼곡한데, 그 안에서 현재 마주하고 있는 고민이나 어려움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풀리게 한다. 더욱이 이 잠언들은 4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유효하게 다가옴으로써 시대를 넘어 인간과 삶을 향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깊은 통찰을 만나게도 한다. 「003 신비주의는 신의 방식이다」 - (…) 당신의 입장을 너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마라. 평범한 대화에서도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신중한 침묵은 지혜의 성소다. 해결책을 너무 구체적으로 밝히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 이는 비판의 여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