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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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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 민음사 20세기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 버지니아 울프, 가부장제와 성적 불평등에 맞서 여성 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한 페미니즘의 정전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여권 신장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은 멀어만 보인다. 성적 불평등을 둘러싼 크고 작은 문제들은 여전히 빈번하고, 그 마저도 편 가르기의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인 것이다. 심지어는 무관심과 방관, 회피로 일관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니.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던 것을 토대로 한 『자기만의 방』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이유랄 수 있다. 이를테면, 삶을 향한 자세와 태도에 대한 지침서가 돼 주는 것이다. 그 안에서도 여성에게는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단연 ..
한 권으로 보는 월리를 찾아라! | 마틴 핸드포드 | 북메카 30 YEARS OF WHERE'S WALLY? 해사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은 언제나 소중하고 고맙고 그립다. 아주 우연하게 마주한 '월리를 찾아라!'가 딱 그랬다. 무려 '30주년 기념 한정판 골드 에디션'이란 긴 부제가 덧붙여져 새로 발간된 것을 보고, 마치 오랜 친구와 재회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그 시절의 나는 틈만 나면 바깥으로 놀러 다닐 궁리만 하는 ― 이를테면, 아파트 뒤편의 작은 숲 속에서 잠자리와 집게벌레 따위를 잡으러 다니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가득한 놀이터에서 숨바꼭질과 얼음땡을 하며, 운동장이나 주차장에 나가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쌩쌩 타던, 요즘 같은 여름날에는 정작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핫도그와 컵라면이 먹고 싶어서 집 앞 야외 수영장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
기사단장 죽이기(전2권)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현실과 관념의 경계를 꿰뚫는 이야기의 힘 대범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무라카미 하루키 월드의 집대성 현현하는 이데아와 전이하는 메타포의 방대한 서사가 펼쳐진다. 그 중심에는 저명한 일본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가 있다. 삼십 대 중반의 초상화가인 '나'는 그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이내 '이 그림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권 p.110)고 직감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 앞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과 비현실, 가상과 실재, 실제와 환상을 넘나드는 세계 안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당면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야만 한다는 믿음만이 존재할 뿐.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는 혼란과 시련, 상실의 연속 안에서도 삶을 다시금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 문학과지성사 유일무이해지는 동시에 비밀이 되는 것 시간이 자꾸 묻는다. 살아온 날들에 대해, 살아갈 날들에 대해. 나는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자못 진지하게 골몰한다. 대답해 보려고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배웠으므로. 그런데 늘어놓는 말들이 쌓인데 쌓이고 또 쌓여서 어느새 거대한 산이 됐다. 한낮인데도 한낮 같지 않은, 그 산중 어딘가에 내가 있다. 검은 입에서 나온 말들에 갇혀서 어느 날은 타는 목마름에 물을 찾아 헤매다가, 다른 날에는 가려움증에 온몸을 베베 꼬다가, 또 어느 날에는 죽은 듯이 잠자코 있다가, 또 다른 날에는 메스꺼움에 헛구역질을 해 대다가. 스미는 빛의 양이 줄어드는 정도만큼씩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은 사이좋게 깊어간다. 그렇게 한 시절을 보내고 껍질을 벗는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비로소 '슬..
바깥은 여름 | 김애란 | 문학동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 01 누군가는 어느 날 갑자기 뜻하지 않게 무언가를 잃었고, 다른 누군가는 도리어 아주 오래전부터 의도하고 계획했었을지도 모를 무언가를 잃었다. 『바깥은 여름』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그 찰나의 순간이 머금고 있는 깊은 상실에 대해 말한다. 그 서려 있는 상실의 여운에 대해 말한다. #. 02 어디선가 그 비슷한 얘기를 들어본 것도 같다. 그게 TV 뉴스였던가, 의도치 않게 엿들은 타인의 대화에서였던가. 습관적으로 만지작대는 스마트폰을 통해 눈대중으로 훑은 어느 기사에서 마주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것마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세계 어디에선가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라는 걸 확신한다. 어쨌든 그들은..
꾿빠이, 이상 | 김연수 | 문학동네 "다만 무한한 어떤 것 앞에서는 존재 그 자체가 중요하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애매해진다는 말입니다." 김연수 작가의 『꾿빠이, 이상』이 재판되었다는 소식 이후, 책장에 꽂아 놓은 것이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다 최근 웹서핑 중 우연히 이상의 부인이기도 했지만, 김환기의 부인이었던 변동림이었다가 김향안이 된 한 여인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이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환기 역시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 둘 사이에 이런 연결고리가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간 미뤄뒀던 『꾿빠이, 이상』을 읽게 됐다. 이상의 죽음 직후 만들어졌다는 데드마스크를 둘러싼 엇갈린 증언을 이야기 한 「데드마스크」, 철저하게..
수인(전2권) | 황석영 | 문학동네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황석영이 몸으로 써내려간 숨가쁜 기록 황석영은 만주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가족과 월남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뉜다. 학창 시절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랑의 시기를 보내다, 해병대로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다. 유신체제를 반대하고, 광주항쟁과 6월 항쟁을 겪으면서 나라의 민주화를 바라며 급진화한다. 이후에는 방북과 망명에 이은 수인 생활을 한다. 굴곡진 시대가 몰고온 소용돌이에 갇혀있던 한 개인의 몸부림이 고스란히 대한민국 현대사로 박제됐다. '수인(囚人)'의 이름으로 엮은 두 권의 책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의 삶에서 방북은 오로지 본인 의사에 따른 결정이었지만, 그로 ..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오기와라 히로시 | 알에이치코리아 전할 수 없었던 마음, 지울 수 없는 후회… 인생 한 켠에 남아 있는 아련한 기억을 소환하다! 소설집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 실린 여섯 편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는 가족의 이야기다. 혈연으로 이어진 친밀함 너머에 자리한 미움과 원망, 후회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그것. 어쩐지 낯설지 않다. 어느 한 구석에서 시작된 시큰함이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가는 듯한 쩌릿함 마저 느껴진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자식이고 형제·자매이며 나아가 부모이기에, 그들의 얽히고 설킨 감정의 타래가 선연하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짐짓 누가 읽더라도 가슴 한 켠이 아리고 마는 단편들이 아닐 수 없다. 「성인식」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는 딸의 성인식에 참가하기 위해 한번 더 생의 의지를 다진다. 「언젠가 왔던 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