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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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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김훈 | 학고재 그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인조 14년인 병자년(1636) 12월 초, 청의 칸(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은 직접 대군을 몰고 조선을 침략한다. 이에 조선 왕은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청군에 포위당한 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결국 다음 해인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항복한다. 병자호란의 이야기다. 장편소설 『남한산성』은 그 47일 간의 고요하지만 몹시 치열했던 병자년의 기록이다. 조정 신료들은 나라의 앞날을 두고 대립각을 세운다. 끝까지 청에 맞서야 한다는 척화신 김상헌과 화친 후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 둘 사이에서 인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무..
유년의 뜰 | 오정희 | 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4 오정희 작가의 두 번째 창작집인 『유년의 뜰』. 1981년 출간 당시 작가는 후기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지나간 시간들, 그리고 현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강할 때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위안받는다. 나 역시 그렇다. 잠이 안 오는 밤, 나는 자주 생을 바쳐 훌륭한 작품을 남긴 이들을 생각하고 글에 대해 성실함이 생에 대한 그것이며 진실로 소중히 아끼는 것들을 사랑하고 지키는 확실한 방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p.266)"라고. 지난 시간 정성스레 수놓아 완성한 글을 차례로 세상에 내놓으며, 마음 한 켠에 차곡히 쌓아뒀을 작가의 진심이 비로소 알알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다. 작가로서 수십 번, 수백 번 고뇌하며 그간 어떤 마음으로 펜을 잡았을지, 조용히..
7년의 밤 | 정유정 | 은행나무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 당신이라면 저주받은 생을 어떤 타구로 받아칠 것인가 7년의 밤. 책을 덮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주받은 생이라는 것이 과연 이들뿐이겠는가, 하는 생각. 세령호사건의 시작은 칠흑 같은 밤 술을 먹고 운전대를 잡은 한 남자, 최현수의 실수에서 비롯된다. 그는 자신이 행했던 그날 밤의 실수에 대해 통렬한 후회를 하며 고통스러워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알기에 애써 불안함을 잠재우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만 골몰한다. 그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야만 하는 것, 바로 하나뿐인 아들 서원이 존재하는 이유다. 사건이 발생하고 칠년의 세월 속에서 그는 수없이 그날의 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날 밤을 포함한 세령호에서의 2주를 끝없이 복기한다. 그러..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 이기호 | 마음산책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한 사람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습니다. 단편 소설 보다도 더 짧은 길이의 소설 40 편이 실린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편 수에 비례하게 소설 속 등장인물 역시 매우 다양하다. 직업, 연령은 물론이고 그들이 처한 상황 모두 제각기지만, 우리는 이들의 모습 안에서 묘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것은 내 이야기, 내 주변 이야기, 하다못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눈에 띄어 훑었던 기사에서 만난 이야기 혹은 흘려 들었던 라디오 뉴스에서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우리네 이야기인 이유일 것이다. 말하자면, 제자리걸음인 현실을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랄까. 그래서인지, 짧은 글이라는 것이 무색하게도 그 여운만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때론 웃음에, 때론 눈..
ふわふわ(후와후와) | 村上春樹 | 講談社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한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 단쓰! 일본에서 출간된 문고본 마지막 페이지를 들춰보니, 발행일이 2001년이다. 그렇다면 첫 선을 보인 것은 그에 2~3년은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어쩐지 가는 곳마다 양장본은 물론이고, 문고본 조차도 몇몇 서점에선 발견조차 하지 못하던 것을 신주쿠 기노쿠니야에서 겨우 찾은 것이다. 여하튼 그리하여 손에 들어온 『'ふわふわ, 후와후와』. 여백의 미를 한껏 살린 그림책이기에 정말이지, 후하게 잡아도 10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이 그림책을 찾았던 이유는 비록 고양이와의 동거 경험은 없지만, 적잖은 시간을 강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기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하리라는 기대감 탓이었다. 더욱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
모멘트 | 더글라스 케네디 | 밝은세상 사랑은 갔어도 진실은 남았다! 일생에 단 한번뿐인 운명적 사랑 이야기! 미국 맨해튼 출신의 여행 작가 토마스 네스비트는 독일에서 한 여인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상대는 동베를린 출신의 페트라 두스만.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페트라가 동독 비밀경찰의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토마스는 충격에 휩싸인다. 크게 분노한 토마스는 페트라에게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둘 사이의 인연은 끝나버린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흐릿한 그림자처럼 페트라에 대한 기억도 서서히 희미해져가던 어느 날, 토마스 앞으로 독일 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편물이 도착한다. 페트라의 부고와 함께 전해진 노트 두 권. 동독에 남겨진 아들 요한을 위해 동독 비밀경찰의 요구에 응할..
채식주의자 | 한강 | 창비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세 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하나의 소재를 공유하여 쓰인 연작이면서도, 각기 화자를 달리하여 서술하고 있기에 독립적인 한 편으로도 손색이 없다. # 01. 「채식주의자」 영혜의 남편이 화자로 등장한다. 모든 면에서 무난했던 아내가 불현듯 꿈을 꾼 이후로 냉장고 안의 모든 고기들을 내다 버린다. '나'는 자신의 식사에 계란 프라이조차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강한 불만을 표출하며, 처가 식구들에게 아내의 행동을 알린다. 얼마 뒤, 언니 인혜의 집들이 자리에서 영혜는 가족들로부터 고기를 먹을 것을 강요받는다. 이에 영혜는 과도를 집어 들어 자신의 손목으로 갖다 댄다. # 02. 「몽고반점」 영혜의 형부이자, 언니 인혜의 남편이 화자로 등장한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나'는 이년..
그것은 꿈이었을까 | 은희경 | 문학동네 그래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발밑까지 타들어갈지언정 길고 긴 꿈을 꾸고 싶다 #. 01 꿈을 꾼다. 어떤 날은 무슨 꿈을 꾼 것 같긴 한데, 도무지 떠올려지지 않는 꿈도 꾼다. 그래도 좋았는지 나빴는지 혹은 이도 저도 아닌 꿈이었는지는 알 수 있다. 기묘하게도 꿈의 잔상은 어렴풋하게나마 남는 것이다. 나는 그 점을 무척이나 진지하고도 신기하게 여겨왔다. 그런 날에는 온종일 희미한 기억 사이에서 전해지는 꿈의 뒷맛을 다시며 그것에 메여있기 일쑤다. #. 02 은희경의 『그것은 꿈이었을까』에 등장하는 '준'은 꿈속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친구 진과 함께 방문한 고시원 레인 캐슬에서 묘령의 여인과 마주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 자신을 만나러 오는 여인, 그렇게 이 소설은 시작된다. #. 03 진에게..